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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의 여신 에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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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수석
고수석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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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북한학 박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는 기원전 13세기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자 심술이 났다. 그래서 잔칫상에 황금사과를 던져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 노련한 에리스는 섭섭한 감정을 험담하거나 이간질로 화풀이하지 않았다. 황금사과에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는 문구만 새겼을 뿐이다. 에리스는 그 황금사과를 놓고 여신들(헤라·아프로디테·아테나)이 치열하게 ‘미모 대결’을 할 줄 알았고 결국 10년 전쟁으로 가는 대참사를 유도했다.

 여신 에리스가 이번에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수소폭탄을 던졌다. 노련하게 심술이 왜 났는지 설명하지 않았고 수소폭탄에 문구도 새기지 않았다. 에리스는 문구를 새기지 않아도 김 제1위원장이 자신의 의도대로 한반도에 불화를 일으킬 줄 알았던 모양이다. 에리스의 예상은 적중했다. 김 제1위원장은 핵 버튼을 눌렀고 한반도는 다시 긴장이 조성됐다. 미국은 전략폭격기 B-52를 한반도 상공에 띄웠고 한국은 대북 확성기를 다시 틀었다. 북한도 이에 질세라 대남 전단을 살포했고 무인기를 군사분계선으로 침범시켰다. 한·미·일은 중국에 대북 압박의 수위를 올리라고 요구했고 중국은 오히려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에리스의 ‘심술’이 한반도에 제대로 먹히고 있다.

 트로이 전쟁이 10년 동안 끌었던 이유는 인간들만의 전쟁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트로이 왕자 헥토르는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신들이 싸움을 더 원했다. 트로이 편에는 황금사과를 받은 아프로디테·아폴로·아르테미스, 그리스 편에는 황금사과를 못 받은 헤라·아테나·헤파이스토스가 있었다. 남북한도 상황이 비슷하다. 탈냉전 이후 20여 년 동안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평화를 원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6·25전쟁에서 피를 흘린 미국과 중국이 서로의 국익을 앞세우다 보니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번에도 남중국해에서 갈등을 벌인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로 연장전을 확산할 조짐이다.

 미국은 이번 기회에 대중국 견제 강화 전략으로 동북아의 패권을 움켜쥐려고 한다. 지난해 9월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핵에 한목소리를 냈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아직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히려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불편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중국은 미국이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으면서 자꾸만 중국에 책임을 떠넘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의 요구대로 시늉을 낼지언정 주도적 대북제재 및 적극적 해결에는 회의적이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시간을 벌려고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대충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 속에서 과연 한국이 미·중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그들의 국익에 맞춰주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에리스의 ‘심술’이 밉기만 한 이유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북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