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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역사 백성희 별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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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역사 백성희씨가 별세했다. 91세.

고인은 8일 오후 11시18분쯤 서울의 한 요양병원 입원 중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삶은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 연극사(史)였다. 192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본명 이어순이)은 1943년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 같은 해 연극 '봉선화'로 데뷔했다. 올해까지 무려 73년간 무대를 지켰다.

‘봉선화’ 지방 공연 때의 일이다. 대본 검열을 받아야 공연을 할 수 있던 시대였다. 해당 주재소에서 갑자기 한국어 대사를 모두 일본어로 바꾸라고 했다. 서툰 일본어로 대사를 급조해 무대에 섰다. 말도 안 되는 대사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일본어가 희롱거리가 돼버린 것이다. 결국 순사들이 공연을 중지시키고 배우 몇몇을 연행했다. 그러자 관객들이 주재소를 몰려갔고, 그 기세에 놀란 순사들이 배우들을 풀어줬다. 고인은 “그 날 사건은 ‘연극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으로 내게 남았다. 연극은 분명 사회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연기는 정석이었다. 기교나 현혹이 아닌 기본에 충실했다. "작품은 가려서 선택하지만 배역은 가리지 않는다"고 했고, "발음과 대사에 공을 들인다"고 했다. "배우는 슬픔에 메여 울어도 대사만큼은 틀림없이 들리게 해야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고인은 분석력을 배우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극중 인물의 성격 분석은 보편적 이해에 기반해야 하지만 평범하거나 상투적이어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특히 1964년 구포댁 역으로 출연한 연극 ‘만선’을 잊지 못했다. 시골 어부의 실성한 아내 역이었다. "사투리 쓰는 해변가 여자라고 하면 으레 거칠게 생각하거든. 나는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마음을 꺼내보고 싶었어. 초라하고 누추한 현실을 살지만 마음은 아름다운 여자…" 그는 구포댁을 '슬프고 여리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연기했고, 그 작품으로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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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단원생활 65년=고인의 연기 인생엔 국립극단이 함께 있었다. 해방 후 연출가 이해랑의 극단 신협에서 활동하다 1950년 신협이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되면서 국립극단 창단 배우가 됐다. 현존하는 유일한 창립단원이었다. 1972년 국립극단에서 처음 시행한 단장 직선제에서 최연소 여성 단장으로 선출돼 1974년까지 재직했고, 리더십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1991∼1993년 다시 한번 단장을 지냈다. 1998년부터 국립극단 원로단원에 이름을 올렸다. 2002년부터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

지난달 나온 고인의 회고록 『연극의 정석』에는 국립극단 창단 당시의 상황이 생생하다. “유치진 초대 국립극장 극장장은 입장료 수입 중 제작비를 뺀 나머지의 30%를 출연료로 지급했다. 당시 배우 월급은 보통 회사원 월급의 2∼3배에 달했다”는 게 고인의 기억이다. 배우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사명감도 커졌다. 국립극단 위상에 맞는 품위와 실력을 갖추기 위해 배우들에게 책 읽기와 규칙적인 생활을 강조했다. 배우로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는 선배들이 단호하게 질책했다. 배우끼리 연애도 금지됐다. 고인은 “이런 태도는 요즘 배우들도 본받아야 한다”고 짚었다.

201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배우의 이름을 따 문을 연 극장인 '백성희장민호극장'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평생 400여 편의 연극에 출연했으며, 최근까지도 '3월의 눈'(2013), '바냐아저씨'(2013) 등에 출연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나결웅, 딸 나미자다. 장례는 대한민국 연극인장이며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호다. 발인은 12일 오전 8시 30분, 영결식은 오전 10시 용산구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갖는다. 영결식 후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손진책 전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연출로 노제가 진행된다. 장지는 분당메모리얼파크다. 02-3010-2232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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