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살아 있는 유산’과 역사의식-조명래 (단국대 교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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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래 (단국대 교수)

이방인이 되어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를 들어온다면 연변에 50년 이상이 된 건축물을 몇 개나 볼 수 있을까? 도심으로 들어 온 그는 600년 이상이 된 서울의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5000년 역사를 알지 못한 그의 눈에 비친 ‘초 현대화된 서울’은 근대의 기간 동안 급조된 도시의 모습 그 자체일지 모른다. 이는 우리의 5천 년 역사가 부정되는 순간이고, 우리의 역사적 정체성이 부정되는 순간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엔 도시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우리의 역사적 켜는 이토록 얕다. 잦은 외세의 침입과 혼란을 겪는 동안 찬란한 유산들이 훼손되고 수탈되었으니 온전히 남은 게 별로 없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산의 빈곤을 고달픈 역사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을 듯하다. 도시에 50년 이상이 된 건물을 찾기 힘든 까닭은 50년도 안 되어 뜯고 새로 짓기 때문이다. 누구도 가족의 역사가 배어 있는 집이 없어지고 동네의 역사가 묻어있는 마을이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 ‘근대의 것’조차 남겨두려 하지 않는다.

해방과 더불어 본격화된 우리의 근대(화)도 이젠 반세기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근대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사용해 왔던 건축물, 시설, 도구, 그리고 각종 생활자원엔 근대적 삶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나이테가 깊게 새겨지고 있다. 고달 펐지만 꿈을 가지고 더불어 살던 달동네, 산업화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공장건물, 시대의 아픔을 정신으로 승화시켰던 예술인들이 살던 집, 건축적 이상향을 담아내려던 모던 빌딩들,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동네 시장통, 도시의 근대적 발전을 잇기 위한 도로나 다리, 장안의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선술집, 근대교육을 열었던 학교건물 등이 그러하다. 이 모두는 도시를 통해 이룩한 한국 특유의 근대성의 신화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소중하게 간직해 후손에게 물려주면 근대를 대변할 훌륭한 유산이 된다.

역사는 저 멀리 어디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삶과 내 동네 속에 있다. 역사로서 근대의 유산은 근대의 나이테가 선명히 끼이는 지금의 일상과 그 언저리에 있는 생활의 방식과 도구들이다. 이러한 유산을 우리는 ‘살아 있는 유산’이라 부른다. 박물관에 ‘박제화’된 유산과 달리, ‘살아 있는 유산’은 주인이 있고 생활 속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지만, 그 속엔 근대의 기록이 하나하나 담기고 있는 중이다. 미래에 값진 유산이 될 것을 현재 살아서 준비하고 있는 게 ‘살아 있는 유산’인 셈이다. 미래유산이 될 지의 여부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현재의 것을 얼마만큼 소중하게 여기고 간직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간 우리는 수많은 잠재적인 근대의 유산들을 개발이란 이름으로 없애 왔고, 또한 없애고 있다. 근대를 지우는 이러한 행위는 우리 스스로 ‘현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고 미래의 유산을 파괴하는 것이다. 역사를 이렇게 서슴지 않게 지울 수 있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만큼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우리는 내 집과 내 동네가 안전하지 않는 게 판명나면 ‘축, 안전진단 통과’란 플래카드를 내거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20여 년도 채 안 된 멀쩡한 집과 동네를 허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한 우리에겐 ‘죽은 유산’만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찬란한 역사는 나와 내 동네의 찬란한 역사의 합이다. 역사의 찬란함은 그래서 내 역사의식이 바로 설 때부터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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