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남성 투톱 영화 줄줄이 … '터프 가이'들 혈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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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주 영화'야수'(12일 개봉.감독 김성수)의 시사회에 앞서 배우들의 무대인사가 시작되자, 객석에선 이런 소리가 터져나왔다. '야수'는 천방지축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형사(권상우)와 법을 중시하는 검사(유지태)가 손을 잡고, 폭력조직에 맞서는 얘기다. 한마디로 '남자의 대결'을 전면에 내건 이 영화에서 여자배역이 설 자리는 미미하다. 여배우의 상대적 기근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올 충무로에는 이처럼 남성 투톱을 내세워 범죄와 폭력을 다루는 영화들이 줄을 잇는다. '야수'와 '홀리데이'(19일 개봉, 이성재.최민수)를 필두로, 상반기 개봉을 목표로 한 영화만도 '사생결단''열혈남아''강적'등이 촬영 중이다. 저마다 남성성이 물씬 풍기는 제목을 달았지만, 그 실체는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서 관객의 기대를 부추길 만하다. 이 중 실제 지강헌 탈주사건을 모티브로 한 '홀리데이'는 시사회 이후 따로 소개할 예정이라 논외로 했다.

"구속 껀은 미안하게 됐다. 내도 정직 묵었다 아이가. 나와바리 다 증발했는데 우예 살 끼고."(황정민)

"갱찰이 무신 범법자 걱정을 다 합니꺼"(류승범)

부산영상위원회 실내 세트를 비롯, 영화 전체를 부산에서 촬영 중인 '사생결단'(감독 최호)의 한 대목이다. 지난 연말 촬영 현장을 찾았을 때, 푸근한 시상식 소감으로 화제를 모았던 '순진남' 황정민은 온데간데없었다. 검은 선글라스에 말투도 느글느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질 형사로 변신한 황정민은 류승범이 연기하는 젊은 마약상을 구슬러 다른 거물 마약상을 잡으려는 중이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 관계의 두 인물에게 전통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을 들이대기는 쉽지 않다. 두 배우의 표현을 각각 빌리면 형사는 "왜 달리는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달리는 경주마"(황정민)이고, 마약상은 "달리고 싶지 않은데 휘둘리는 경주마의 꼬리"(류승범)다.

이처럼 '주인공은 선(善)'이라는 전제가 무너지는 것은 '열혈남아'(감독 이정범)도 마찬가지다. 조직에서 찬밥 신세인 건달(설경구)이 신입 조직원(조한선)을 데리고 다른 조폭두목에게 복수하러 갔다가 그 어머니와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편집본을 본 사람들이 노숙자가 주인공이냐고 묻더라"는 설경구의 전언처럼, 두 주인공은 좀체로 폼나는 구석을 찾기 힘들다. 설경구는 자신의 배역을 "다들 빠져버리길 바라는 '앓는 이' 같은 존재"로, 조한선이 연기하는 신입 건달을 "'오아시스'의 종두가 낳은 자식 같은 인물"로 표현한다.

두 남자가 처한 상황은 영화'강적'(감독 조민호) 역시 처절하다. 자식의 수술비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려 중인 형사(박중훈)가 조직에 이용당하고 살인 혐의로 쫓기는 건달(천정명)의 인질이 되는데, 둘 사이의 거래가 미묘한 우정으로 발전하는 줄거리다. 다만 앞서 두 영화의 인물들이 행복한 결말을 맞기 힘든 상황인 것과 달리 '강적'은 그래도 숨통이 트일 여지를 남겨둔다. 제작사 미로비전 측은 "비교적 밝게 그려질 영화"라고 설명한다.

이들 영화는 연기파로 자리잡은 중견 배우와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가 짝을 이룬다는 점에서 각각의 연기 대결에도 관심이 쏠린다. 드라마'패션70' 이후 꽃미남으로 부상한 천정명이 거친 남자로 변신하는 것도 궁금한 대목이지만, 특히 류승범.조한선은 각각 부산.벌교 사투리로 연기해야 하는 점이 새로운 도전이다. 류승범은 사투리 연기에 대한 부담을 묻자, "송강호 선배가 부산말이나 서울말이나 다 한국말이라고 그러더라"며 여유를 보였다.

이런 뒤에 올 영화들이 남성성의 이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먼저 개봉하는 '야수'는 남성성의 일차적 의미에 충실하다. '행동파 형사'와 '냉철한 검사'라는 두 주인공의 대립은 성격과 방법의 차이일 뿐, 정.재계까지 발을 뻗친 거물 조폭(손병호)에 맞서는 전선에서는 같은'선(善)'이다. 둘은 영화의 막판에 '합법'의 틀을 벗어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조폭을 파멸시키려는 영웅적인 목표를 뚜렷이 지향한다.

또렷한 저음으로 장문의 대사를 소화하는 유지태도 호연을 보였지만, 액션 장면이 잦은 영화 전체의 무게중심은 자연히 권상우 쪽에 기운다. 권상우는 이전의 소년 같은 이미지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듯, 덥수룩한 차림새로 시종일관 격앙된 감정과 혼자 여럿에 맞서는 액션을 쏟아낸다. 이런 전개는 스크린 가득 남성성을 뿜어내는 데는 성공한 듯 보이지만, 드라마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데는 단점이 된다. 영화평론가 김봉석씨는 "무리한 해피엔딩 대신 파국적인 결말을 선택한 점은 돋보이지만, 아무리 마구잡이 형사라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갈 만큼 캐릭터에 현실성이 없다"고 아쉬움을 지적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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