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과 대화·타협 법치주의 흔들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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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불법파업이라도 대화와 타협이 먼저다."

김진표 부총리는 조흥은행 불법파업 사태 때 중재자로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공권력 투입 등 엄정한 법 집행은 '대화와 타협' 다음이란 것이다.

국어학자들은 말 그대로만 해석해도 "대화와 타협을 할 의지가 충만한 것으로 들린다"고 한다. 어법에는 맞을지 모르나 이는 국가의 기본틀인 법치(法治)의 정신과는 어긋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선 불법을 저지른 사람과 대화와 타협을 한다는 자체가 법리에 안 맞는다. 범죄자를 처벌하는 게 아니라 용인한 것은 물론, '대화와 타협'이란 새로운 룰(법)을 적용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법 위에 대화와 타협을 놓겠다는 것으로 비친다는 점에서 법치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아무리 정당한 주장이라도 불법적인 방식이 허용된다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어렵다. 법치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수단의 정당성을 따지고 이를 어길 경우 가혹한 처벌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또 대화와 타협이 법보다 상위개념이 되는 순간 법은 무력해지고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고 지적한다. 불법파업 세력과의 대화.타협 선언은 그 자체로 현장에서 법을 어기는 행위를 부추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은 법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불법이 용인돼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법치주의는 악법이라도 반드시 지킨다는 원칙이 바로 설 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내세운 대화.타협의 기준과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도 법치주의와는 배치되는 점이다. 잣대가 모호하면 편리한 대로 해석하기 쉽다. 법령에 시시콜콜한 내용과 절차까지 규정해 놓는 것도 이런 자의적 해석을 막기 위해서다. 예컨대 조흥은행 사태의 경우 노조가 내세운 파업 명분은 '일괄매각 반대'였으나 정부는 "명분이 없는 불법파업"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정부가 '대화와 타협'을 내세우다 보니 실제 협상 메뉴로는 고용보장과 경영진 구성 등이 올랐다. 노조가 간여해선 안될 사항을 협상하도록 정부가 부추긴 셈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주동자 처벌. 정부는 "불법파업의 경우 주동자는 끝까지 사법처리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이는 단순 가담자는 사법처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그럴 경우, 일반 가담자들은 사법처리에 대한 부담 없이 불법파업에 가담하는 등 불법행위를 확대 재생산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불법파업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고, 정부는 가담자 모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만 불법행위 참여를 억제할 수 있다. 물론 가담 정도에 따라 책임의 경중(輕重)을 따져 처벌수위를 정해야 하지만, 이는 철저히 사법당국에 맡겨둬야 한다.

이상렬 기자

도움말 주신 분=김세중 국어연구원 어문자료부장, 김정호 자유기업원 원장,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이철수 이화여대 법대 교수, 임영철 변호사(가나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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