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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성탄 전야, 특별한 집행유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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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했던 서초동 형사법정의 크리스마스 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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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진(가명)!

24일 오후 3시 서울고등법원 312호 법정. 김상준 부장판사(형사5부)가 18세 피고인을 호명했다.

“오늘이 무슨 날이죠?”
“크리스마스….”
“이 판결문은 새출발을 할 수 있는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김 부장판사는 법정 경위를 통해 판결문을 김씨를 비롯한 5명의 피고인에게 일일이 건넸다. 모두 틱 장애, 알콜의존증 등 경미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 부장판사는 이들 중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현주건조물방화미수·살인미수 등의 죄를 짓고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던 4명의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해 사회로 돌려보냈다. 대신 30~80시간의 정신치료나 40시간의 알콜중독치료를 받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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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부장 판사]

“호진이는 생일이 언제지?”

“7월 17일입니다.”

"그날이 무슨 날인가요? 어떤 소명이 있나요?”

“제헌절입니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앞에 죄를 저지른 이유는 나중에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나쁜 것을 미리 경험하는 운명인 것 같아요. 앞으로는 남을 돕는 일을 해야 합니다.”

“네.”

이날 김 판사는 선고기간 내내 피고인들과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주고 받았다. 대부분 위로나 격려의 말이었다. 가끔은 반말과 농담도 섞어가며 피고인들이 편한 상태에서 선고를 받을 수 있게 했다. 치료 조치가 필요한 사람들 외에 일반 피고인들에게도 많은 선처가 있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꾸지람을 해도 모자랄 판에 감싸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같은 법정에 선 다른 피고인은 자신의 선고기일을 조금만 더 늘려달라며 애원을 하기도 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고 집에 어린 자식하고 암 투병으로 어렵게 사는 처가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하루라도 더 집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피고인은 몸을 덜덜 떨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선처를 요청했다. 김 판사는 고민 끝에 2월로 정했던 선고기일을 한 달 더 연기했다.

하지만 다양한 사정을 감안해도 형을 낮출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김 판사는 “연말을 맞아 피고에게 비록 법정구속을 하진 않지만 실형을 선고하는 것에 대해 재판부도 여러 가지 마음의 고충이 있었다. 피고에게 유리한 쪽으로 형을 정하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등 위로의 말을 전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서울고등법원에서 하루 종일 1심의 형량을 낮춰주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해 석방하는 등 선처가 이어졌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판사도 사람인지라 연말이 되면 가혹한 형을 선고하는데 심적 부담을 갖게 된다”며 “엄벌해야 할 사건은 앞으로 당기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선처가 가능한 사건들의 선고기일을 잡는 경향이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선처가 모든 사람에게 웃음을 준 건 아니었다. 김 부장이 유기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 6개월의 실형을 받은 김모씨에게 징역 1년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자 방청석에선 소란이 일었다.

피해자 측으로 보이는 한 여성은 “말도 안 돼!”라고 소리쳤고 계속해서 “어휴..어휴..”큰 숨을 내뱉었다. 피고인 측 사람들이 “집에가자. 됐다”며 재판장을 빠져나간 뒤에도 이 여성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곧 이어 그녀는 “재판장님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이럴 수 있습니까! 나라가 너무 원망스럽네요”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이날 형사1부(부장 김수일)가 오전 10시부터 선고를 시작한 318호 법정에서는 피고인들의 “감사합니다”라는 말들이 계속됐다.

지난해 8월 술 취한 사람의 가방을 친구가 훔치는 과정에서 망을 봐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월을 실형을 선고받았던 이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선처를 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반말로 딱딱하게 자신의 생년월일을 말하고 판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미 체념한 듯 했다. 그런 그에게 재판부는 “이씨의 범행은 가벼우며 아내도 임신중인 사정을 감안한다”며 원심을 깨고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석방입니다”라는 재판장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재판부를 쳐다봤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시고, 가정에 충실하고 올바른 직업을 얻으세요”라는 김 판사의 말에 이씨는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선고와 동시에 얼싸안은 부자도 있었다. 건설업체에서 대표와 이사를 맡고 있던 아버지와 아들은 갚을 돈도 없는 상태에서 하도급 업체에 업무를 주고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혐의(사기)로 지난 10월 1심 선고를 받았다. 아들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지만 아버지는 징역 1년의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됐었다. 이날 수의를 입은 아버지와 사복을 입은 아들이 다시 나란히 법정에 섰다. 이들 부자에게 재판부는 “아버지의 형은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 다소 무거워 부당하다”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아버지의 ‘석방’ 판정에 아들은 연신 “감사하다”고 되뇌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바라보며 안도의 눈길을 나눴다. 아들은 아버지가 들어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재판장을 내려왔다. 기다리던 친구가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했다”고 말했다.

한편 자신을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한 21살 박씨는 자신의 보석심리 사건에서 재판장을 향해 “보석이 허가 된다면 사회에 복귀해서 연말을 맞아 베이비박스의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나 자장면 배식 봉사를 하고 싶다”며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재판장에게서 “따로 결정해서 판결하겠다”는 긍정적인 신호가 나오자 박씨는 방청석의 어머니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어머니도 아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밝은 표정만 보였던 건 아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첫 재판을 받기 위해 어두운 표정으로 법원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오후 4시40분 형사9단독 강성훈 판사의 심리가 열린 서울중앙지법 523호 법정은 수십 명의 스님들로 가득 찼다. 두 명은 파란 수의차림이었고 나머지는 승복 차림이었다. 종단 내분 과정에서 폭력 행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국불교 태고종의 전·현직 총무원장 등 승려 13명에 대한 첫 번째 공판이 열렸기 때문이다.

재판시작 전에 판사가 “오늘 크리스마스네요”라고 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킥킥’거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날 공판은 증거 채택을 위한 기일만 정하고 금세 마무리됐다. 스님들은 다소 밝아진 표정으로 서로 격려하며 법정을 빠져나왔다.

서초동 형사법정의 크리스마스 이브는 이렇게 저물어 갔다.

정혁준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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