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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 ‘이터널 선샤인’의 헤어 컬러

중앙일보

입력

[디테일의 재발견] ‘이터널 선샤인’의 헤어 컬러

올해 극장가의 기적은 ‘이터널 선샤인’(2005, 미셸 공드리 감독)이다. 10년 만에 재개봉된 이 영화는 이렇다 할 마케팅 없이 30만 명에 가까운 관객과 만났다. 무엇이 이 영화의 흥행을 만든 것일까. 수시로 바뀌는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헤어 컬러도 한몫 했을지 모른다.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먼의 기발한 상상력과 공드리 감독 특유의 비주얼이 만난 ‘이터널 선샤인’은 결코 이해하기 쉬운 영화가 아니다. ‘기억을 지운다’는 설정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지만, 기억의 세계를 스크린 위에 시공간적으로 확장하는 방식은 관객에게 지적 쾌감과 함께 숙제를 안겨 준다. 기억은 시간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의 일반적인 연대기적 구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것을 우발적인 기억의 순서로 재배열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퍼즐이며, 그 전후 관계를 맞춰 직선적인 시간대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건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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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다행히 공드리 감독은 친절한 단서를 제시한다. 바로 클레멘타인의 헤어 컬러다. 그 색은 클레멘타인과 조엘(짐 캐리)의 관계 변화를 가늠케 한다. 우리가 영화에서 가장 먼저 클레멘타인을 만나는 곳은 몬타우크 해변이다. 그녀는 기억을 지운 상태이며 머리카락은 푸른 색이다. 이곳에서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만나고, 함께 기차를 탄다(사진 1).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자신을 본 적 있지 않냐고 묻고, 조엘도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한다. 클레멘타인은 “알아보지 못한다면 머리 색때문일 것”이라며, 지금 자신의 머리 색이 ‘블루 루인(Blue Ruin)’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헤어 컬러를 이야기한다. 그린 레볼루션(Green Revolution), 레드 메너스(Red Menace),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는 자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초고 시나리오엔 퍼플 헤이즈(Purple Haze)와 핑크 이레이저(PinkEraser)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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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사진 3

이 이름들은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단 순서대로 배열하면, 첫 번째는 ‘그린 레볼루션’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처음 만났을 때다(사진 2).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지는 건, 어쩌면 혁명(레볼루션)일지도 모른다. 이후 클레멘타인은 ‘레드 메너스’로 접어든다(사진 3). 그들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상징이다. 그럼에도 위협(메너스)일 수밖에 없는 건, 그 색채가 지니는 위험성과 현기증 같은 감정 상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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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이후 클레멘타인은 자칭 ‘에이전트 오렌지’ 단계가 된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에서 따온 이 이름처럼, 둘의 관계는 서서히 메말라 간다. 마주 앉아 건조하게 식사하는 차이니즈 레스토랑 장면이 대표적이다(사진 4). 그리고 결국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기억을 지우고 블루 루인 단계가 된다. 즉 폐허(루인)다.

이러한 색채의 변화는 마치 사계절을 의미하는 듯하다. 새싹이 움트는 봄과 수풀이 우거지는 여름이 ‘그린’이라면, 단풍이 최고조에 달하는 ‘레드’를 거쳐 ‘오렌지’ 빛의 낙엽이 떨어진다. 그리고 차가운 ‘블루’의 계절인 겨울이 온다. 그렇다면 ‘이터널 선샤인’은 순환 구조다. 그래서 영화는 맨 마지막 단계인 블루를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한다. 각자 기억을 지운 그들은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블루 루인(폐허)에서 그린 레볼루션(혁명)으로 가는 과정이며, 자세히 보면 조엘은 다크 그린의 비니를 쓰고 있다(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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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사족 하나. 그렇다면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의 원래 머리 색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걸까. 한 장면 있다. 조엘의 유년기. 울고 있는 조엘을 클레멘타인이 데려갈 때 그녀는 자연스러운 블론드다(사진 5). 아니, 혹시 모르겠다. 모자 안에 어떤 컬러가 있을지. 아니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옐로우 피버’가 이 색일지도.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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