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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신세대 병사들 자기관리 철저 … “로션·샴푸 불티나게 팔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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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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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격오지 장병들에게 황금마차는 애인처럼 반가운 존재다. 육군 1사단 벼락바위 소초 병사들이 16일 황금마차에서 간식거리를 구매한 뒤 즐거워하고 있다. [파주=조문규 기자]

16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시 육군 1사단 벼락바위 소초. 체감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떨어진 가운데 노란색으로 칠한 3.5t의 탑차 한 대가 울퉁불퉁한 시멘트 포장길을 덜컹거리며 나타났다. 트럭은 최전방 병사들이 생활하는 소초 앞마당에 섰다. 이어 트럭에서 내린 남성이 트럭을 향해 리모컨을 누르자 마치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차량처럼 ‘징~’ 하는 소리를 내며 변신하기 시작했다. 트럭의 옆면과 뒷면 덮개가 열리자 내부에 설치된 30개의 칸막이엔 라면과 과자, 비누 등 생필품이 가득 차 있었다.

최전방 이동식 매점 ‘황금마차’

PX 없는 격오지에 생필품 방문 판매
주 2회 순회 … 대당 월 매출 5000만원
과자·휴지·내복 등 500여 가지로 다양
냉동고 갖춰 아이스크림도 팔아

 최전방 철책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6개월 이상을 외부와 단절된 채 생활한다. 휴가는 물론 외출과 외박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에게 이동식 매점은 애인의 편지를 가져오는 우체부와 같은 존재다. 병사들은 이동식 매점을 ‘황금마차’라 부른다. 충성이동클럽이 정식 명칭이지만 장병들은 짧게 ‘황마’라고도 한다. 차량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한 데서 따온 별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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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마차가 최전방 격오지 부대로 이동하고 있다. (위) 육군 1사단 병사들이 부대를 찾은 황금마차에 올라 간식거리를 고르고 있다. [파주=조문규 기자]

 ◆황금마차 납시오=‘황마’가 오는 날은 장날이다. 이날도 트럭이 도착하자 밤새 경계근무를 서고 단잠에 빠져 있던 ‘야근조’ 장병들까지 뛰어나왔다. 전역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한 병사는 “황금마차가 1시간가량 머물다 다른 부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시간을 놓치면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며 “꿀잠도 좋지만 간식과 치약을 사러 나왔다”고 말했다. 우상진(46) 점장은 “외로운 섬과 같은 격오지에서 생활하는 장병들에게 황금마차는 바깥 세상과 연결하는 숨통과 같다”며 “단순히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 이상으로 외부 사회와의 연결 통로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황금마차 앞에선 계급도 없었다. 과거엔 선임병들 눈치를 보느라 아예 이용을 하지 못하거나 선임들의 구매가 끝난 뒤 잠깐 들르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엔 그런 군기는 사라졌다는 게 국군복지단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날도 선임병들보다 먼저 라면과 음료를 사들고 나온 김승호(21) 일병은 “그거 아세요? 한겨울엔 짜장라면과 불닭볶음면을 섞어 비벼 먹으면 매운 사천짜장 맛이 나요. 몸이 후끈해진다니까요”라며 전방 부대만의 특별한 ‘레시피(요리법)’를 공개했다. 장바구니에 참깨라면과 탄산음료 등을 담은 이원우(24) 이병은 “이것만 있으면 최전방 군 생활도 할 만하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황금마차는 전방의 오아시스인 셈이다.

 구입 품목에선 ‘짬밥’의 노하우가 묻어났다. 김찬희 상병은 “이제 제대로 월동 준비를 해야 한다”며 치즈가 든 라면과 과자, 양갱 등을 한가득 샀다. 김 상병은 “갓 입대한 이병과 일병들은 아직 여기서 겨울을 안 나봐서 모른다. 폭설이라도 내리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황금마차가 여기까지 못 들어온다”고 했다. 몇 날 며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비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양 위주로 구매하는 신참 병사들에 비해 고참들은 맛과 기호가 중요했다. 김성욱(20) 상병은 “망고 푸딩은 오늘 처음 보는 간식이라 하나 사 봤다”며 “아침마다 나오는 우유를 맛있게 먹기 위해 초코 분말도 좀 샀다”고 말했다.

 민간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전방에선 휴지도 귀하신 몸이다. 과거엔 모든 생필품을 군에서 보급했지만 최근엔 돈으로 지급하고 선호하는 물품을 사도록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황금마차가 끊기면 휴지조차 살 수가 없다. 우 점장은 “아침마다 두루마리 휴지 100개 정도를 싣는데 부대 4~5곳(150명 안팎)을 다니다 보면 동이 나기 일쑤”라며 “어쩔 수 없이 한 명당 휴지를 2개까지만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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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평짜리 최신식 편의점=육군은 1979년 소위 ‘육공트럭’이라 불리는 K-511 트럭(2.5t) 11대를 개조해 이동식 매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차체 전체를 노란색으로 칠한 게 황금마차의 시초다. 지금은 3.5t의 상용 트럭을 개조해 45대를 운용하고 있지만 색깔은 그대로다. 황금마차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황금마차가 찾는 곳은 격오지다 보니 도로 사정이 좋지 못하다. 그래서 큰 차량을 투입할 수가 없다. 3년째 이 지역 부대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우 점장은 2013년 처음 황금마차를 몰고 파주 봉서산 고지에 있는 부대를 찾던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본인도 7년간 육군에서 부사관 생활을 하다 중사로 전역했지만 그렇게 험한 곳에 부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좁은 급경사의 길을 올라갈 때 ‘자칫 잘못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우 점장은 “돌길·진흙탕 같은 험한길 운행이 많아 차량을 4륜구동으로 개조하고 앞바퀴엔 충격완충장치를 따로 달았다”고 소개했다.

 이날 운행한 황금마차는 지난해 생산된 차량이었다. 높이 3m에 길이와 너비가 각각 6.3m, 2.4m로 작은 편의점 크기다. 황금마차에는 식품류는 물론 내복, 방한 장갑에 샴푸와 로션, 세제 등 500여 가지 물품이 구비돼 있다. 맥주맛 음료도 2종류나 판매되고 있다. 물론 무알코올이다. 우 점장은 “4.5평 정도 되는 공간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만물상”이라고 말했다. 군은 지난해부터 황금마차를 최신식으로 개조하고 있다. 차량 안에 폐쇄회로TV(CCTV)는 물론 에어컨과 히터를 설치했다. 한쪽 편엔 냉동식품·아이스크림 등을 보관하기 위한 냉동고도 있다.

 간식 구매 방법은 월급이 들어오는 직불카드(나라사랑 카드) 사용이 대부분이다. 카드로 계산하다 보니 해프닝도 벌어진다. 이날 한 병사는 구두약과 운동용 장갑, 라면에 넣어 먹는 치즈, 햄, 과자를 장바구니 하나 가득 담은 뒤 카드를 내밀었다. 하지만 카드 잔액이 부족했다. 당황한 병사는 급히 집에서 준 비상용 ‘사제 카드’를 꺼내 계산했다. 우 점장은 “장병 월급날이 매달 10일인데 이날 이후로 며칠간은 황금마차가 오면 식료품을 싹 쓸어 간다”며 “월말이나 월초엔 잔액 부족으로 계산대까지 가지고 온 것을 다시 주섬주섬 가져다 놓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우 점장의 하루 이동거리는 최소 100㎞다. 우 점장의 새 애마인 2014년식 3.5t 트럭의 마일리지는 1년4개월 새 3만㎞를 넘었다. 황금마차는 마트가 설치돼 있지 않은 대대급 이상 부대, 격오지, 해안경계부대를 대상으로 운영한다. 야외에서 훈련작전 또는 행사 시 피지원부대장이 요청하면 지원하고 있다. 우 점장은 “황금마차는 기본적으로 점장과 이동마트 판매병이 2인1조로 움직인다”며 “격오지별로 1주일에 평균 2회 방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달 매출은 대략 5000만원 안팎이다. 매출은 국군복지단에서 모아 장병 복지 용도로 쓰이게 된다.

파주=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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