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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생존 결정하는 건 수저 색깔" 서울대생 유서 남기고 투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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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재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서울대 생명과학부에 재학중인 A(20)씨가 18일 새벽 3시쯤 거주하던 신림동 옥탑방 건물에서 투신해 숨졌다고 18일 밝혔다. 그는 투신 전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 유서를 올려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생존을 결정하는 건 결국 수저 색깔이었다”고 적었다. A씨의 글을 본 친구들이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 구조대원이 출동했지만 A군은 메탄올을 사과즙에 섞어 마신 뒤 이미 투신한 뒤였다.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 A씨는 도착 직후 후두부 출혈로 숨졌다.

A씨는 유서에서 “나를 힘들게 만든 건 이 사회고, 나를 부끄럽게 만든 건 나 자신이다. 더이상 힘들고 부끄러운 일은 없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자살을 암시했다. 또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수저론(부모의 재력에 따라 금수저, 흙수저 등으로 계급을 나누는 젊은 층의 자괴적 표현)’을 언급하며 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서로 수저 색을 논하는 세상에서 나는 독야청청 ‘금전두엽’을 가진듯했다. 하지만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라고 적었다. “내가 일생 동안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지만 이 세상의 합리는 나의 합리와 너무나도 달랐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다. 저와는 너무도 다른 이세상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도 했다.

서울 지역의 한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지난해 서울대에 입학한 A씨는 전액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뛰어난 편이었다. ‘모범 선배’로 선정돼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후배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학 교수,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는 편이었다. 또 학업과 병행해 대학 학보사에서 3학기 동안 학생기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늘 좋은 성적을 얻어야하고, 모든 일에서 뛰어난 성과를 얻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대학 시절 내내 심한 우울증이 그를 괴롭혔다. A씨는 평소 지인들에게 “너무 힘들어 모두 남겨 놓고 떠나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또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박카스 병에 메탄올을 가득 채워 다니며 “힘들때 마시려고 가지고 다닌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울증 치료를 이유로 올 중순 학보사에서 나온 A씨는 최근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PEET)에 응시해 합격선에 가까운 점수를 받기도 했다. 지난 14일엔 친구들과 동해안으로 이틀간 여행을 다녀왔다. A씨의 친구는 “A의 옥탑방을 ‘복덕방’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구들이 자주 놀러가 술을 마시고 놀았다. 지난달 24일에도 과학고 동기 몇명과 옥탑방에서 술을 마셨다”고 전했다.

A씨의 다른 지인은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꼈고,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최근 주변에 ‘금주를 시작할 것’이라고 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학업과 학보사 기자활동을 병행하며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다. 언제나 좋은 성과를 얻어야한다는 압박감에 괴로워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 삶의 허무함이나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자주 올렸다고 한다. A씨와 같은 학과에 다니는 한 친구는 “A가 ‘죽고 싶지만 여동생, 사랑하는 친구들이 눈에 밟혀 포기했다’는 말을 해 걱정했었다. 며칠 전 만 하더라도 밝은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안심했는데 이번 일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A씨의 아버지는 “아들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과학고를 조기졸업한 데 이어 2학년 2학기를 마친 상황에서 3학년 수준의 학점을 이수할 정도로 공부 욕심도 많았다”며 “대학을 다니며 성적 등에 대해 걱정이 많은 것 같아 자신감과 사회성을 키워주려 학생 기자 활동을 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최근 휴대폰 통화내역 등에 대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겠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유족과 A씨의 친구 등을 상대로 우울증 병력과 직접적 사망원인 등 정확한 경위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련기사 ▶농담인데 불편하네 ‘수저 계급론’

http:www.joongang.co.kr/article/18949618

손국희 기자, 김필준·송승환 예비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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