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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0. 新여성-욕망이냐 현모양처냐(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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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목구비와 사지오관 육체에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사나이가 벌어주는 것만 앉아서 먹고 평생을 깊은 골방에 갇혀 남의 절제만 받으리요!"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에 살던 양반집 부인 3백여 명이 뜻을 모아 발표한 최초의 여권(女權)선언문인 '여권통문'의 첫머리입니다. '벙어리.장님.귀머거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 땅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참정권.교육권.직업권을 갖기 위해 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 일은 '놀랍고 신기한'(황성신문) 일이거나, '희한한'(제국신문) 해프닝으로 치부되었을 뿐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일제 시기 이 땅의 인텔리 남성들은 양반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몸을 욕망 해소의 대상으로만 여기거나, '현모양처'라는 미명 아래 여성들이란 그저 남성을 낳고 기르고 시중드는 종속적 존재라고 치부하였습니다.

염상섭은 "'사랑걸신증'이라는 성적 박테리아가 방방곡곡을 휩쓸어서 인심이 자못 퇴폐한 모양이오. 이에 따라 이혼, 야합이라는 희비극이 날을 따라 도처에 연출되는 모양"이라며, 자유연애를 꿈꾸는 신여성들을 대놓고 비꼬았습니다('감상과 기대', '조선문단', 1925).

이광수는 "민족 발달상 또는 가정 개량상 어느 정도까지는 여자의 인격을 인정함이 유리할 줄로 생각한다. …나는 이론상으로는 여자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나 이해타산상 이를 주장한다"('혼인론', '매일신보', 1917) 고도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당시 주체적 인간으로 거듭나려고 했던 여성들 앞에는 일제라는 외부의 적만큼이나 큰 걸림돌이 또 있었던 셈입니다.

박노자 교수의 지적처럼 나혜석과 윤심덕 같은 '영웅'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여성들은 '욕망과 몸의 자유' 보다는 '정숙'한 여자의 삶을 추구했고, 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여성들이 갈구한 사람다움이 욕망의 자유와 몸의 주권 찾기에 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녀들이 남편을 보필하여 아들을 훌륭히 키우는 '현모양처'만을 추구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인형의 가(家)','매일신보', 1921)", 즉 남성들의 '인형'이 아니라 홀로 선 주체로 당당히 살고 싶었던 나혜석은 "현부양부(賢父良夫)의 교육법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이상적 부인', '학지광', 1914)"이라며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에 물든 남성들에게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그녀의 꿈은 욕망의 자유를 얻는 데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아아! 나는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죽든지 진흙에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여하튼 나가볼 욕심"이니 동포 여성들도 "사람될 욕심" "서양의 학문을 소화해 조선화시킬 욕심", 그리고 "자손의 미래를 위해 사업가가 될 욕심"을 품으라고 목청을 높였지요('잡감(雜感):K언니에게 줌', '학지광', 1917).

의사 이영실도 의사로서 완전한 존재로 우뚝 서기 위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뚫고 돌진할 각오"를 다지며 "여자는 용기가 없고 연구심이 부족하다"는 차별적 인식과 "조선의 가정제도가 여자에게 주는 과중한 질곡"에 굴하지 않고 도전해 나갔습니다.

신문기자 김명순(1896~1951)은 "내가 성장하는 나라는 약하고 무식함으로 역사적으로 남에게 이겨본 적이 별로 없었고 늘 강한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겠다. 벗어나야겠다. 남의 나라 처녀가 다섯자를 배우고 노는 동안에 나는 놀지 않고 열두자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고 하더군요('탄실이와 주영이', 조선일보, 1924).

이처럼 신여성들은 식민지라는 악조건 아래에서도 여성의식과 직업의식, 그리고 민족의식을 갖고 남성 지배 사회와 식민지라는 이중의 장애를 넘어 의사.교사.기자.간호사.예술인 등 사회 각 분야에 활발히 진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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