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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66조 쏟아부어도 농가소득은 줄었다

중앙일보

입력

#1993년 12월 15일 세계무역기구(WTO) 주도의 다자간 농산물 개방 협정인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이 타결됐다. 한국에서 ‘농촌 살리기’ ‘농촌 사랑’ ‘국산 농산물 애용’을 내건 운동본부가 속속 출범했다. 농민단체, 농업협동조합, 학계는 물론 종교계까지 나섰다. 재계도 앞장 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는 ‘농업 경쟁력 강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지원 방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대부분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 타결에 맞춰 42조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농업 경쟁력 강화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2015년 11월 30일 한국 농업 시장의 개방 수준을 더 높이는 한ㆍ중 자유무역협정(FTA)이 국회 관문을 통과했다. 협정 비준과 동시에 정부는 농어촌 지원 예산을 2조원 늘린다고 발표했다. 민간기업과 공공기관이 참여하는 농어촌 상생협력기금(가칭)도 1년에 1000억원씩 10년에 걸쳐 1조원 규모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정부 계획은 “생색내기”란 농업계의 비판과 재계의 반발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한 농산물 시장 개방 이후 20년 넘게 정부가 관성적으로 반복한 농어촌 지원 정책이 가져온 후폭풍이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FTA 타결 같은 시장 개방 조치가 있을 때마다 그에 대한 피해액을 추정한 뒤 단발적으로 보조금만 늘리는 정책을 반복해왔다”며 “오히려 규모나 내용면에선 우루과이 라운드 발효 직후인 김영삼ㆍ김대중 정부 때보다 더 후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막음용’ ‘땜질’식의 농업 지원책이 오랜 기간 누적되면서 나타난 부작용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2007~2014년 시행된 한국 정부의 농업 보조금 사업 개수는 49개에 이른다. 농업 면세유, 농축산 기자재 부가가치세 면제 같은 조세 사업 종류도 16개나 된다. 농업 보조금 정책영향평가를 맡았던 농업 정책 전문가마저 “너무 많고 복잡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국 정부가 지난해 말 국제무역기구(WTO)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2002~2011년 10년간 농업 보조금으로 66조929억원을 지급했다. 이 기간 농업 총 생산액 381조6394억원의 17.3%에 달하는 액수다. 2012년 이후에도 달라진 건 없다. 국회예산정책처 통계를 보면 한국 정부는 농업 보조금으로 2012년 5조8305억원, 2013년 5조8945억원, 2014년 5조6219억원을 지출했다. 2012~2014년 깎아준 세금(국세 감면액) 역시 16조5433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국회예산정책처는 ‘농업보조금 관련 재정 사업과 조세 지출 연계방향’ 보고서에 “실질 농업 소득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감소세가 뚜렷하며 소득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가의 조세ㆍ부담금과 경영비 규모는 오히려 증가했다”며 “소규모 영세화, 고령화에 따른 농업 포기, 전업으로 경지 면적, 종사자 수,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기여도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라고 적었다.

문한필 한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유럽 등 농업 선진국은 농업 총 생산액의 30~40% 비중으로 농업 보조금을 쓰고 있는데 한국은 이에 못 미친다”며 “장기적으로는 보조금 규모를 늘리는 게 맞지만 현재 농업 지원 정책의 양보다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에 한ㆍ중 FTA 지원책으로 확대된 직불금 제도의 허점도 짚었다. “직불제는 농업 생산의 효율성과 수준을 높이는 것과 무관하게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보조금으로, 이번 대책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과거 직불제를 확대해왔던 농업 선진국 역시 그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고 농업수입보험 같이 농작물 다양성 확대와 농업의 자발적 발전을 유도하는 유연성 있는 대책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가 가장 우려하는 건 한ㆍ중 FTA가 아닌 다음 수순이다. 미국·중국·일본·동남아·유럽의 ‘농업 강국’ 대부분이 참여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한ㆍ중 FTA는 연습 경기에 가깝다. 지난달 5일 공개된 TPP 협정문을 감안할 때 더 강력한 수준의 농업 개방이 불가피해 보인다. 임정빈 교수는 “그동안 반복한 입막음용 땜질 처방은 지난 20년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농업계와 비농업계의 갈등만 유발하고 정작 효과는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농업은 기본적으로 투자에 따른 효과가 나타나는데 매우 오래 걸리는 산업”이라며 “선진국이 그랬듯 FTA 같은 그때그때 이벤트에 맞춘 단발 정책이 아니라 농어업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중장기 관점에서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세종=조현숙ㆍ김민상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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