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엽 "ML서도 홈런타자 통할 자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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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롯데 경기를 앞둔 25일 오후 대구 야구장 스탠드에서 최연소 3백 홈런의 주인공 이승엽(삼성)과 마주앉았다. 그는 시종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교 3학년이던 1994년 이후 처음 관중석에 앉아본다. 여기서 응원하면서 한 경기라도 마음 편하게 봤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이승엽은 "결혼 후 '바른생활맨'이 됐다"며 가정 얘기부터 꺼냈다. 2년 전 모델 출신의 부인 이송정(22)씨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냈을 때는 홈런왕이 됐을 때보다 더 기뻤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나니까 엄청난 책임감이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 전엔 술도 많이 마시고 밤늦게까지 놀러 다녔지만 결혼 후에는 우승 축하 파티 이외에는 일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송정씨는 종종 휴대전화로 남편에게 '사랑해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등의 문자 메시지를 날려 보낸다. 이승엽은 "경기 중에는 휴대전화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곧바로 볼 수는 없으나 숙소에 돌아가 이 메시지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털어낸다"고 말했다.

2년쯤 뒤 아이를 가질 생각이라는 그는 "아내는 결혼할 때만 해도 야구를 몇명이서 하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반 전문가가 됐다"며 웃었다.

메이저리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눈빛은 빛났다.

이승엽은 "새로운 세계에 갈 생각을 하면 힘이 솟는다"면서 "마이너리그에 가더라도 그 생활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천재형이라기보다 노력형에 더 가깝다면서.

그는 그러나 미국에 가면 홈런 타자가 아니라 중거리 타자로 변해야 살 수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에 두번이나 가서 겪어봤지만 홈런도 쳤고,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라며 "최소 20홈런 이상은 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가장 선호하는 팀으로 알려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대해서는 "좋아하지만 현실적으로 가기는 어려운 팀"이라고 했다. "올해 초 브레이브스 스프링캠프에 가려고 했는데 새로운 1루수를 구했다고 해서 일부러 플로리다 말린스로 바꿨다"면서 "브레이브스가 조건이 좋을 수도 있지만 미련은 없다"고 말했다.

이승엽이 미국으로 떠나면 한국 야구의 인기가 식지 않을까 걱정하는 얘기가 있다고 했더니 "선동열.이종범 선배가 떠났다고 해서 야구의 인기가 식었느냐"며 "스타가 계속 새로 나오게 돼 있다"고 했다. 그는 겸손하기로도 정평이 나있다.

홈런을 친 후에도 꼭 "팀이 도와줘서, 동료들이 잘해줘서…"라는 말을 앞세운다. 홈런 세리머니가 적은 이유에 대해서도 "홈런 맞은 투수들의 아픈 마음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없으면 최고가 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물어봤다. 그는 "나는 실력뿐만 아니라 승부욕, 정신력에서도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자부하는 것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최고의 자리에 둘이 오를 수는 없다. 경쟁에선 이겨야 한다. 정해진 한도 안에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나는 이길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승엽은 원래 투수로 출발한 선수다. 투수에 미련이 남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계속 투수를 했으면 일찌감치 퇴출돼 유니폼 벗고 다른 일 알아보러 다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승엽은 "지난 20일 SK와의 경기에서 10-5로 앞서다 10-11로 역전패한 날은 너무 분해 미칠 것 같았고 이건 야구도 아니다라는 생각에 잠도 안 왔다"고 말했다. 그날 통산 2백99호 홈런을 쳤던 그는 모든 언론사의 인터뷰를 사양하고 그냥 집에 갔다. "오래 기다렸던 기자분들께는 미안했다. 그러나 내가 홈런을 친 기쁨보다 팀이 패한 슬픔이 몇배나 더 컸다. 도저히 인터뷰할 기분이 아니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대구=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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