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분자의 세계] 3. 인공염료의 혜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8면

월드컵 4강 신화는 우리 국민이 함께 이루어낸 위대한 성과였다.특히 우리 민족의 저력을 온 세계에 마음껏 보여준 붉은 악마의 거대한 물결(사진)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화학 합성 염료가 없었다면 그 붉은 물결이 가능했을까. 아마도 꼭두서니라는 식물이 날벼락을 맞아 멸종되는 비운을 겪었을 것이다.

꼭두서니의 뿌리에 쇠똥과 썩은 올리브유를 섞어서 붉은 천연 염료를 만드는 기술은 고대 터키인들의 비법이었다. 그러나 한 달 동안 무려 17단계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 그런 방법으로는 수백만 명의 응원단을 붉게 물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붉은 악마의 진한 감동은 화학 공정을 거쳐 단기간에 대량 생산된 '알리자린' 덕분에 가능했다. 자연에서 얻은 재료를 화학적으로 처리해 염료를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지중해의 티레 지방에 서식하는 뮤렉스라는 소라 1만 2천 마리를 깨뜨려서 2주 동안 삶고,말리고,썩히는 작업을 거치면 겨우 1.4g의 자주색 염료가 만들어졌다. 밀깍지벌레 7만 마리를 뜨거운 물에 삶아서 말리면 코치닐이라는 붉은 염료 4백50g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든 염료가 섬유에 달라붙도록 하려면 독성이 강한 중금속 염이나 백반과 같은 물질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천연 염료를 쓰는 염색도 본래부터 공해 산업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고대 파피루스의 기록처럼 '생선 비린내 같은 악취'를 풍기던 천민 염색공들은 도시에서 먼 곳으로 쫓겨가서 푸대접을 받으며 힘든 일을 견뎌야만 했다. 인디고.대청.쪽과 같은 염료 작물을 이용하면서 사정은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도와 신대륙이 온통 인디고와 대청 밭으로 변해 버리는 문제가 생겼다. 불쌍한 식민지 백성들은 영국 귀족들의 사치를 위해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염료 작물을 가꿔야만 했다. 1897년에 인도에서 그렇게 사용되던 경작지가 무려 서울의 13배라고 한다.

오늘날 누구나 신분에 상관없이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값싼 합성 염료 때문이다. 1856년 영국의 화학자 퍼킨이 산업 폐기물이었던 콜타르에서 합성했던 '모브'라는 보라색 합성 염료가 그 시작이다.

싼값에 대량으로 공급하는 합성 염료는 더 이상 지배층의 전유물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그런 합성 염료에도 문제는 있다.

연간 50만t 이상의 염료를 생산하여 염색하는 과정이 환경에 심각한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극심한 신분 차별의 도구였고,직접적인 환경 파괴의 원인이기도 했던 천연 염료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흔하다고 마구 낭비하는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보다 안전한 물질을 만들어내려는 '녹색 화학'을 이용해서 환경 친화적인 염료와 염색법을 개발해야 한다. 물 대신 이산화탄소를 염색 용매로 사용해서 수질 오염의 가능성을 제거한 환경 친화적인 새로운 염색법의 개발이 그런 노력의 결과다.

원하는 분자를 설계해서 합성하는 화학적 지식을 활용해서 자연도 흉내내기 어려운 신비로운 색을 누구나 즐기도록 해주는 것이 현대 화학이 추구하는 평등한 미래의 모습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