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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원칙 행동으로 보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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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제 5단체장의 23일 긴급 모임은 최근 노동 현안에 대처하는 정부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듯한 모습이었다. 긴급 회동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5단체의 회장.부회장 10명이 전원 참석했다.

발언 수위도 종래 모임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 참석자는 "최근 몇년 새 노동 현안을 논의한 것 중 가장 강한 톤의 말이 오갔다"고 전했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망한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제스처로만 법과 원칙을 강조할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주문을 했다.

이날 회견장 분위기는 긴박했다. 오전 11시 30분쯤 회의장소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 모인 전경련 손길승 회장과 경총 김창성 회장 등 10명은 짤막하게 사진 취재에 응한 뒤 곧바로 비공개 회의를 가졌다. 40여분쯤 뒤 부회장단 5명이 굳은 표정으로 성명서를 들고 나와 낭독했다.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면서 회장단의 분위기는 격앙되기 시작했다.

회장단은 우선 조흥은행 파업사태에 정부가 나서 협상을 타결한 것을 놓고 "원칙없는 대응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양대 노총이 경쟁적으로 총파업을 벌이는 등 투쟁 일변도의 노동계 파업은 가히 망국적인 처사"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힘으로 밀면 된다'는 힘의 논리가 사회 전체에 만연할 경우 극심한 경제 침체뿐 아니라 사회질서 혼란과 국기기능의 총체적 통제 상실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경제 5단체는 이어 "정부가 법을 안 지키면 기업이라도 법대로 하겠다"고 밝혔다. 전경련 현명관 부회장은 "기업의 무기는 법률"이라며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형사 고발, 손해배상 청구, 가압류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재계는 특히 기업의 해외 이전 등 기업차원에서 취할 수 있는 '자구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총 조남홍 부회장은 "기업들은 작금의 사태에 대응할 힘이 없다"며 "결국 기업은 투자를 중단하고 회사 문을 닫거나 해외로 공장을 이전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른 고용 감소 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근로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 5단체는 또 "현재 10여건의 외국인 투자가 노조 파업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재계 관계자는 "이날 성명서는 재계가 정부에 보내는 '최후통첩'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흥은행.두산중공업.화물연대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김효성 대한상의 부회장은 "노조의 의견이 거의 수용된 타결안이 무슨 협상 결과냐"며 "특히 조흥은행 협상 타결 내용 중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한 내용이 있는데 그런 관행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을 하고도 용서가 되면 누가 불법을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재계는 공공부문 파업의 파장이 민간기업으로 번지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노조가 정부를 밀어붙여 요구사항을 관철하는 것을 본 대기업 노조들이 강한 투쟁노선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재계가 이날 강한 어조의 성명서를 발표한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다. 경총 趙부회장은 "경제계가 느끼는 위기 의식을 알릴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고 회의를 소집한 배경을 설명했다.

외국기업도 이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 최근 서울재팬클럽은 한.일 양국 정부에 대한 건의서에서 "한국정부가 아무리 사업환경을 정비한다고 해도 노사문제를 개선하지 않는 한 한국정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승현 기자

사진 = 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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