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들 ‘배꼽 아래’ 비밀까지 컨설턴트는 알고 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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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5 면

#2008년 18대 총선. 당시 서울 노원병은 노회찬 진보신당 후보의 우세 지역이었다. 뒤늦게 전략공천을 받고 뛰어든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는 정치인으론 ‘애송이’였다. 서민 지역구란 점도 홍 후보와 안 맞았다. 노 후보는 ‘친서민’을 강조하며 대세몰이에 나섰다. 홍 후보는 ‘여러분의 아들·딸도 홍정욱처럼 클 수 있게 하겠다’는 구호로 맞서기 시작했다. 서민의 ‘욕망’을 자극하는 프레임이었다. 결과는 홍 후보의 승리. 그의 뒤엔 이 전략을 기획한 박성민 ‘민’ 컨설팅 대표가 있었다.


#2011년 4월 보궐선거가 치러진 성남 분당을. 한나라당의 텃밭이던 이곳에 강재섭 전 당 대표가 나섰다. 선거가 보수-진보 대결 구도로 흘러가면 손학규 통합민주당 후보는 승산이 없었다. 손 후보는 “보수의 대한민국도, 진보의 대한민국도 없다”고 외치며 다녔다. 이 슬로건을 기획한 김헌태 매시스컨설팅 대표는 “2008년 미국 대선 때 흑인으로서 화합을 강조했던 버락 오바마 후보의 연설을 벤치마킹했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4선을 기록했던 강 후보의 ‘분당 토박이론’은 먹혀들지 않았다. 승리는 손 후보에게 돌아갔다.


선거는 이처럼 ‘프레임’의 대결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구도를 피하고 유리한 프레임을 유권자에게 각인시키면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구도의 기획은 정치 컨설턴트의 몫이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광역·기초 지자체장 출마자 대다수가 선거 때만 되면 내로라하는 정치 컨설턴트를 찾고 있다. 20대 총선이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오피스텔가도 정치 컨설팅 업체 사무실로 채워지고 있다.   이미지·SNS 관리 중요성 커져 정치 컨설턴트의 임무는 다양하다. 출마 후보자와 계약을 마치면 가장 먼저 그에 대한 인터뷰에 들어간다. 성장 배경과 정치 철학에서부터 ‘허리띠 아래’ 얘기까지 숨김없이 털어놔야 한다. 상대 후보의 흑색선전에 휘말릴 소지를 미리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 지역구 여론조사와 핵심 유권자 그룹 인터뷰(FGI) 등을 거치면서 후보의 이미지와 지역민들의 요망사항 등을 파악해 선거 전략을 짜게 된다. 본격 선거전에 들어가면 주기적인 여론조사와 광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관리는 물론 이미지 메이킹까지 모두 컨설턴트의 몫이다. 명함 디자인이나 화장법과 방송 출연을 위한 발성법까지 점검한다.


컨설턴트가 받는 자문료는 국회의원의 경우 1억~2억원, 기초단체장은 2억원, 광역단체장은 5억~10억원 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경비와 홍보물 인쇄비, 인건비 등을 제외하면 25~30% 정도가 컨설턴트 몫으로 돌아간다. 실제론 더 많은 액수를 받지만 선거비용 한도 때문에 이면계약을 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총선 시즌에 메이저 컨설팅 회사는 20여 명, 작은 곳은 3~5명 정도씩 후보를 맡는다고 한다. 직업윤리상 경쟁 후보들을 동시에 맡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2012년 19대 총선 때 여의도 인근에 30~40곳, 전국에 100여 곳의 컨설팅 업체가 있었다.


정치인들의 의뢰는 선거 2년 전에 시작된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손님은 전직 의원들. 조직은 갖췄지만 전략 실패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내년 4월 총선에 대비해 지난해 여름 즈음부터 컨설팅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어 올해 초엔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는 비례대표들이, 가을부턴 현역 의원들이 손을 내밀었다. 선거가 코앞인 내년 초께엔 전략공천을 받은 인사들이 당의 소개로 부랴부랴 컨설팅 회사를 찾아오게 된다.  

2008년 오바마 미국 대선 캠프의 정치 컨설턴트였던 데이비드 액설로드(오른쪽)는 오바마의 당선과 함께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발탁됐다. [중앙포토]

미국선 50년대부터 ‘킹 메이커’로 각광 상업적인 정치 컨설팅은 미국에서 시작됐다. 1950년대 라디오·TV 캠페인과 토론 등 미디어가 대선에 동원되면서 선거 전략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다. ‘선거는 과학’이라 주장한 조셉 나폴리탄이 56년 ‘정치 컨설턴트’라는 명함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92년 미 대선에 나선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It’s the economy, Stupid)”란 슬로건 하나로 지지율이 90%에 달하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무너뜨렸다. 정치 컨설턴트 제임스 카빌과 폴 베갈라의 작품이었다. 이외에 클린턴의 딕 모리스, 조지 W 부시의 칼 로브, 오바마의 데이비드 액설로드 등이 ‘킹 메이커’로 각광을 받았다.


한국에서 정치 컨설팅의 시작은 88년 13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이론’의 최병윤 사장과 ‘연우커뮤니케이션’의 김승용 사장이 정치 마케팅 사업을 시작하면서다. 91년 첫 지방자치선거 때 ‘서울기획’(현 e-윈컴·대표 김능구), ‘민’(대표 박성민)이 창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 컨설팅’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초창기엔 광고나 인쇄, 여론조사 업체 성격의 컨설팅 회사가 주류였다. 컨설턴트도 조사·마케팅 업체 직원이나 보좌관·당직자 출신이 많았다. 돈과 조직이 당락을 가르던 시기라 조직을 끌어다 주는 ‘선거 브로커’와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았다. 한 전직 컨설턴트는 “밤에 사무실에 돈다발을 풀어놓고 아줌마 조직책들을 불러서 나눠주는 일도 했다”고 고백했다. 2000년대 들어 ‘돈 선거’가 법적으로 봉쇄되고 미디어가 중요한 선거운동 수단이 되면서 전략 컨설팅이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됐다. 최근엔 ‘웨스트 윙’ 같은 미국 정치 드라마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가 정치 컨설팅 업계에 뛰어들고 있다고 한다.


정치 컨설팅은 당락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김헌태 대표는 “컨설팅이란 될 사람이 안 떨어지게 관리하는 정도”라며 “선거는 기본적으로 후보와 캠프의 역량으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성민 대표는 “대선, 광역단체장, 보궐선거처럼 미디어의 주목도가 높은 선거는 캠페인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 컨설턴트가 선거 전문가지만 직접 정치에 나서거나 당선자의 참모로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치 컨설턴트 출신으로 2004년 총선에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낙선한 정창교씨(현 관악구청 정책실장)는 “막상 후보가 되니 상황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게 되더라”며 “선거 전문가를 자처하더라도 정확한 정세 판단을 위해 컨설턴트의 객관적 자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정치 컨설팅 산업이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지만 아시아에선 경쟁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성민 대표는 “아시아 시장 규모를 봤을 때 세계 5위권에 드는 정치 컨설팅 회사가 아시아에서 하나 정도는 나오게 될 것”이라며 “선거제도가 미약한 중국이나 대선이 없는 일본보다는 한국이 선거 전략에서 앞선다. 한국 업계에 희망이 있는 이유”라고 했다. 일부 업체는 미국 등 외국 컨설팅 회사와 제휴도 준비 중이다.


세계적으론 이미 68년 국제정치컨설턴트협회(IAPC)가 설립돼 매년 각국을 돌며 총회를 개최하고 있다. 한국에선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캠프 컨설팅을 맡은 김윤재 변호사가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난해 11월 로마에서 열린 47차 총회에 참석했던 김 변호사는 “미국에선 선거 때마다 돈이 과도하게 풀려서 문제가 되는데 한국은 그 반대여서 문제”라며 “적어도 유권자가 투표장에 가기 전에 후보들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캠페인 방식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충형 기자 adc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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