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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한일 정상회담 다음날 '서 있는 소녀상' 만든 여고생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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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종근 기자]

4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앞.

길 가던 시민들이 못 보던 조형물 앞에서 발을 멈췄다. 단발머리에 한복 차림을 한 어린 소녀의 동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얼굴은 영락 없이 앳된 10대인데, 동상의 그림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조각해놨다. 동상 옆에 있는 바닥글을 보니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동상은 일제 치하에서 10대 소녀 시절 끌려가 모진 일을 당하고, 사죄를 받지 못한 채 하나둘 씩 세상을 떠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이런 ‘평화의 소녀상’은 종로구에 있는 주한 일본 대사관 앞을 비롯해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이 동상엔 다른 점이 있다. 피해자 관련 단체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라 고등학생들이 힘을 모아 세웠기 때문이다.

동상 앞에서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이화여고 2학년생 권영서·윤소정(18)양을 만났다. 이화여고는 이화학당의 후신. 공교롭게도 항일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의 후배들이었다.

영서는 “작년에 우연한 기회에 수요집회에 갔던 것이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주먹도끼’라는 교내 역사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고, 중학교 때 교과서로도 배워서 위안부가 뭔지는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집회에 가서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 직접 경험을 말씀하시는 걸 보니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로하고 건강도 안 좋은 할머니들께서 지금도 직접 나와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화가 났고, 창문이라도 열 줄 알았는데 커튼을 닫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일본 대사관의 태도가 놀라웠어요. 어린 우리가 움직이면, 어른들도 뭔가 더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됐습니다.”

소정이는 학생회에서 활동하다가 영서의 생각을 듣고 동참하게 됐다. 소정이는 “위안부 피해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가 고등학생이 된 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란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소녀상 건립을 준비하면서 박물관 전시도 보고 더 알아보게 됐는데, 그럴 수록 화가 났다”고 했다. “할머니들이 바로 우리와 비슷한 나이 때 그런 몹쓸 일들을 당하셨다. 난 조금만 다쳐도 너무 아픈데, 당시 할머니들이 느꼈을 아픔과 슬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했다”면서다.

소녀상 건립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돈 한 푼 없었던 학생들이었기에 일단 교내 대자보부터 썼다. 건립 취지를 밝히고 동참하고픈 학생들은 5000원씩만 기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200만원 정도가 모였다. 이후엔 페이스북을 통해 동문과 학부모들에게 사정을 알렸고, 종잣돈을 500여만원 가까이 모았다.

학생들이 돈을 모으기 위해 낸 아이디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상징하는 ‘나비 배지’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배지 디자인은 그림 솜씨가 좋은 만화 동아리 친구들이 맡았고, 보라빛 날개의 나비 배지가 만들어졌다.

소정이는 “배지를 팔기 위해 만나본 적도 없는 다른 고등학교 학생회에 무작정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324곳에 보냈는데 처음엔 20개 학교에서만 답이 왔다”며 “동참하겠단 학교가 너무 적어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내용을 좀 압축적으로 정리해서 다시 편지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조금씩 호응하겠단 학교가 늘어났다. 최종적으론 53개 학교에서 학생 1만 6000명이 배지를 사줬다.

학생들은 온라인을 통해서도 배지를 판매했다. 2000원에 팔면 1000원이 남았다. 하지만 사실 정가는 큰 의미가 없었다. 영서는 “배지 한 개를 사고 2만원을 주면서 ‘나머지는 학생들이 잘 써달라’는 어른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번 주문에 배지가 수백개씩 팔리는 날도 있었다. 그렇게 3000만원 넘는 돈이 모였다.

소녀상 제작 자체는 순조로웠다.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을 만든 조각가 김서경씨가 제작을 맡았다. 소녀상의 의미를 설명하는 바닥글 문구는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가 써줬다.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를 지도한 이화여고 성환철 (역사)교사는 “혹시나 하고 대학 홈페이지에 나온 이메일로 글을 써주실 수 있겠느냐는 메일을 보냈는데, 신 교수가 투병중인데도 ‘학생들 마음이 너무 예쁘다’며 흔쾌히 승락을 해주셨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암초는 부지 선정이었다. 처음부터 학생들은 정동길 인근을 염두에 뒀다. 정동길은 한국 최초의 남자고등학교인 배재학당과, 최초의 여자고등학교인 이화학당이 들어선 곳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고교생들이 만드는 소녀상’이란 취지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위안부 피해의 아픔을 공감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일제 시대와 연관되는 상징성도 있는 장소를 찾았다.

처음 시도한 곳은 서울시 옛 청사(현 서울도서관)였다.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물이다. 하지만 서울시 측은 난색을 표했다. “취지는 좋지만, 동상 하나가 들어오면 다른 동상들도 넣어줘야 한다.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울시가 지난 8월 철거한 옛 국세청 남대문 별관 부지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서울시는 철거 뒤 역사·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한 기본 계획이 나오려면 11월은 넘어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학생의날(11월3일)을 소녀상 제막식 시점으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시기가 맞질 않았다.

그 다음엔 서울시립미술관 옆의 공터를 주목했다. 처음한 무심한 반응을 보이던 서울시도 긍정적으로 고려하기로 했고, 중구청도 보행 불편 요인 등은 없는지 구체적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구청에서 “덕수궁 근처라 1급 문화재 지역”이라며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허가를 받으려면 11월3일은 훨씬 지나야 했다.

학생들은 마지막 희망을 갖고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의 문을 두드렸다.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호명환 관구장은 즉시 사제회의를 소집했고, 이 자리에서 부지를 내주기로 결정이 났다. 제막식을 불과 보름 정도 앞두고서였다. 성환철 교사는 “5월부터 관청의 문을 두드렸는데 여의치 않았던 일을 작은형제회 사제 분들은 1주일도 안 돼 결정을 해주셨다. 덕분에 3일 제막식을 무사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소녀상이 다른 점은 또 하나 있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일반 소녀상과 달리 손을 높이 든 채 서 있다. 그 손에는 나비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영서는 “학생들이 만드는 소녀상인 만큼 좀 더 의지가 있고 힘찬 모습을 담고 싶어서 우리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라며 “나비는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우리의 마음과 염원”이라고 설명했다.

두 학생도 제막식 바로 전날인 2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한국에 와서 한·일 정상회담을 했고, 위안부 문제가 핵심 현안이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안부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됐고, 전쟁과 상관 없는 일본의 미래 세대에게 이 문제로 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아베 총리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전쟁이랑은 우리도 상관 없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역사, 우리나라가 한 잘못은 우리가 안고 가는게 맞는 거잖아요. 그걸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문제인가요.”(소정) “지금 제대로 사과를 안하는 게 미래 세대한테 더 짐이 될 걸요. 나중에 일본의 우리 또래들이 커서 ‘어, 우리나라가 이런 잘못을 했는데 왜 우리 윗세대들이 사과를 제대로 안 했지?’라고 생각한다면요? 국가 간 관계에서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지금 매듭을 풀고 가지 않으면 언젠가는 독이 돼서 돌아올 거에요.”(영서) 열여덟 소녀들도 알고 있는 정답이었다.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함께한 53개 고등학교>

고양중산고등학교, 관악고등학교, 광영고등학교, 광영여자고등학교, 덕수고등학교, 대광고등학교, 대신고등학교, 동작고등학교, 동해삼육고등학교, 명덕외국어고등학교, 미림여자고등학교, 보성여자고등학교, 서서울생활과학고등학교, 서울금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서울신도고등학교, 서울영일고등학교, 서울오산고등학교, 서울외국어고등학교, 서울우신고등학교, 서울중앙여자고등학교, 성남효성고등학교,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세현고등학교,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 수락고등학교, 숭실고등학교, 신정여자상업고등학교, 여의도고등학교, 영동일고등학교, 영등포고등학교, 영신간호비즈니스고등학교, 예일여자고등학교, 용산고등학교, 용화여자고등학교, 월계고등학교, 이화여대병설미디어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이화금란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정발고등학교, 중경고등학교, 중앙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중화고등학교, 청원여자고등학교, 충암고등학교, 충주고등학교, 풍문여자고등학교, 한강미디어고등학교, 한국삼육고등학교, 혜성여자고등학교, 화수고등학교, 환일고등학교

유지혜 기자·하준호(연세대 정치외교학 3년) 인턴기자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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