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교과서 국정화가 국정 블랙홀이 돼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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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부가 3일 중·고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한 교과용 도서 구분안을 확정고시(告示)했다. 국민 상당수가 교과서 국정화가 아닌 검인정 강화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것이다. 정부는 당초 국정화에 대한 국민 의견을 들은 뒤 5일 고시를 확정하겠다고 예고했다가 돌연 이틀이나 앞당겨 처리했다. 스스로 약속했던 법 절차조차 건너뛰고 속전속결로 강행하겠다는 의도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정부가 2일 밤까지 진행했다는 국민 의견 수렴 절차도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었다. SNS 시대에 우편과 팩스로만 의견을 접수했기 때문이다. 국정화 고시를 계기로 여야 간 대립이 고조될 것임을 모를 리 없는 정부가 굳이 국회 본회의가 열리기로 한 날 고시를 강행한 것도 문제다. 여야가 어렵사리 확보한 대화 물꼬마저 막은 셈이 됐기 때문이다.

 야당은 예상대로 전면전을 개시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선출 등 비쟁점 현안을 처리키로 했던 ‘원포인트 본회의’를 비롯해 정기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보이콧했다.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전쟁이 정점으로 치달으며 모든 국정 현안을 삼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정치권이 ‘교과서 블랙홀’에 빠져 예산과 법안 처리를 미뤄도 될 만큼 한가하지 않다. 청년실업과 저출산·고령화의 수렁이 깊어지는 가운데 산업 전반의 생산성 하락 속에 수출마저 역대 가장 큰 폭으로 추락했다. 침몰 직전에 몰린 나라 경제를 살리려면 노동·금융 등 4대 개혁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런 만큼 정부와 여야는 교과서 논쟁을 정치화해 분열과 혼란을 부추기는 행태를 즉각 중단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우선 정부는 독재·친일을 미화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수준 높은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실현되도록 제작과정 전반을 공개하고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황우여 교육부총리는 “교과서 초안을 단원별로 웹에 올려 국민의 검증을 받겠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국민의 참여 속에 제작이 이뤄지도록 투명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

 국정화 교과서는 이달 말부터 집필을 개시하고 내년12월 감수를 거쳐 2017년 3월부터 교육 일선에서 사용된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제대로 된 교과서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도 정부는 국민이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새누리당도 국정화 논쟁을 빌미로 색깔론을 부추기는 구태를 중단하고, 정부의 교과서 제작 과정에 국민 여론이 최대한 반영되게끔 노력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냉정해져야 한다. 야당은 얼마든지 국정화 강행을 반대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적 현안들을 전부 제쳐놓고 올인 할 사안은 아니다. 장외투쟁 대신 국회 상임위에서 따지고 공청회나 토론회에서 반대 여론을 수렴해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 순리다. 교과서 문제를 국회에서 물고 늘어지되 예산과 경제살리기 법안 처리엔 협조하는 ‘투 트랙 접근’의 슬기가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