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일본에도 성신지교 강조한 선각자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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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2일 한·일 확대정상회담 인사말에서 “오늘 회담이 아픈 역사를 치유할 수 있는 대승적이고, 진심 어린 회담이 돼서 양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아베 총리는 “박 대통령과 함께 노력하고자 합니다”고 했다. [박종근 기자]

2일 오전 11시7분 청와대 집현실. 비공개 단독정상회담을 끝낸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나란히 들어섰다. 아베 총리를 안내하는 박 대통령의 표정은 밝았다. 지난해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3국 정상이 만났을 때 아베 총리의 “안녕하시므니까”란 한국어 인사를 그냥 지나칠 때의 무뚝뚝함과는 달랐다.

에도 때 외교지침 『교린제성』 지어
임진왜란을 명분없는 살상극 규정
아베, 사죄도 불편한 표현도 안해
"남중국해, 국제 공통문제" 거론엔
박 대통령, 평화적 해결 원칙 밝혀

 박 대통령은 확대정상회담을 시작하며 “외교에서 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본에도 한·일 관계는 ‘진실과 신뢰에 기초해야 한다’는 성신지교(誠信之交)를 말씀하신 선각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성신지교는 일본 에도 시대 외교관이자 유학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년)가 쓴 대조선 외교지침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으킨 임진왜란을 대의명분 없는 살상극으로 규정하며 했던 말이다. 그는 임진왜란 후 경색된 조선과 일본 관계 회복에 힘썼다. 1693년 대마도로 건너가 조선과의 외교와 무역을 담당했다. 『숙향전』과 『이백경전』 등의 소설로 공부를 하면서 조선어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조선어 입문 학습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써 일본 외교관들에게 가르쳤다. 이에 아베 총리는 “일·한 관계 개선을 위해선 정상 차원에서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두 정상이 앞선 비공개 단독정상회담에서 주고받은 대화의 핵심이 바로 이 말들”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두 정상은 단독정상회담을 했다. 오전 10시10분에 시작한 단독회담은 예정된 30분을 넘겨 60분 동안 진행됐다.

 단독정상회담에선 위안부 문제가 논의됐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위안부 문제, 그리고 안보협력에 대한 이야기가 주였다. 북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한·미·일 안보 공조와 협력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전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두 정상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서로 할 얘기를 했지만, 얼굴을 붉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베 총리의 사죄 같은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리 측이 불편해할 만한 표현을 하지도 않았다. 양측 모두 철저하게 업무적인 태도로, 비공개라는 자리를 십분 활용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양측이 상대방의 다른 생각을 공유하고, 그래도 해결은 해야 한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간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는 화법을 쓰곤 했다. 지난 4월 하버드대 연설에서는 “인신매매에 의해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8월 종전 70주년 담화에서는 “전장의 그늘에서는 명예와 존엄에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가해 주체도, 반성도, 문제 해결을 위한 약속도 없는 ‘3무(無) 화법’이었다.

 한국 방문 기간 중 아베 총리는 공개적으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 서울 시내 호텔에서 일본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미래 세대에 장애를 남겨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평소 입장만 간략히 설명했다. 대신 산케이신문 지국장 문제 등을 논의했느냐는 질문엔 “다양한 과제에 대해 일본의 입장을 말씀드렸다”며 부정하지 않았다. 일본 당국자는 일본 기자들에게 “남중국해 문제가 국제사회의 공통 문제라는 점을 총리가 제안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아베 총리가 남중국해 문제를 제기해 박 대통령은 ‘분쟁은 국제적으로 확립된 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취지의 정부 공식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한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일(현지시간) 한·일·중 정상회의에 대해 “3국 정상, 특히 회의를 주최한 박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낸다. 3국 간 협조를 강화하고 동북아 내 강화된 협력을 촉진시키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냈다.

글=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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