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 챔피언 먹었어, 웃으며 떠난 차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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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왼쪽)가 FA컵 우승 메달을 아버지 차범근의 목에 걸어준 뒤, 함께 활짝 웃고 있다. [뉴시스]

“나도 선수로, 감독으로 우승해 봤어. 허허”

서울, 인천 꺾고 축구 FA컵 우승
차두리, 국내 무대 무관의 한 풀어

 “다른 아버지라면 감동했을 텐데 너무 잘난 아버지를 뒀어요.”

 지난달 31일 FA컵 시상식에서 ‘차붐’ 차범근(62)과 그의 아들인 ‘리틀 차붐’ 차두리(35·FC 서울)가 나눈 대화다. 아들은 자신의 마지막 우승 메달을 아버지의 목에 걸어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농담을 건넸지만 속으로는 대견해했다. 차두리는 그라운드에 내려온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차 부자는 눈웃음은 물론 눈가의 주름까지 붕어빵처럼 닮았다. 차두리는 “아버지가 속으로는 기뻐하고 우승 메달을 고이 간직하실 것”이라고 해맑게 웃었다.

 차두리는 어려서부터 ‘아빠처럼’이 꿈이었다. 차범근은 칼럼을 통해 ‘두리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 신문들이 ‘zwite chaboom(두 번째 차붐)’이 태어날 것이라며 지면 한 면을 채웠다. 두리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난 발목에 큰 수술을 받았다. 어느 날 새벽에 두리가 울어대 놀라 뛰어 올라갔다. 깁스를 한 아빠처럼 되고 싶었던 두리가 종아리에 붕대를 감고 자다가 피가 안 통하는 바람에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이다’고 회상했다.

 2002년부터 독일 7개팀에서 뛴 차두리는 몸에 센서를 붙이고 얼마나 솔직하게 대답하는지 체크하는 독일 잡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모든 기능이 흥분되고 정상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차두리에겐 늘 짐이었다. 그래서 차두리는 학창 시절 친구들이 숙소를 이탈할 때도 홀로 남았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차두리는 해피엔딩으로 축구인생 1막을 마무리했다. 그는 인천과 FA컵(프로 아마 최강을 가리는 대회) 결승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오른쪽 윙백으로 풀타임을 소화하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차두리는 FC 서울에 17년 만의 FA컵 우승과 함께 내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안겼다. 2013년 국내 복귀 후 FA컵·아시아 챔피언스리그·아시안컵 준우승에 그쳤던 차두리는 3전 4기만에 우승컵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서울은 올 시즌 K리그 3경기를 남겨뒀지만, FA컵 결승이 차두리의 고별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차두리는 “지난 한 달간 발바닥 통증이 있어 약을 먹으면서 경기에 나섰다. FA컵 결승이 선수로 마지막 경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감독을 할지 마음 속으로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축구를 위해 희생하고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독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날 예정이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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