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진영의 대표적 논객 박홍 신부 인터뷰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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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강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박홍(朴弘·62) 신부를 20일 오전 11시 서강대 사제관에서 만났다. 朴신부는 1994년 “정당·학계에 주사파가 활동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빚었었다. 땀을 흘리며 사제관에 등장한 朴신부는 “나무 자르고, 도서관 주변을 정리하고 왔다”며 “노동하면 운동도 되고 땀을 흘려 정신건강에 좋다”고 말했다. 그는 “심장이 안 좋아 담배를 하루 한 갑으로 줄었다”면서도 2시간 정도 이어진 인터뷰 내내 담배를 손에 놓지 않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 (이사장으로 선임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둔 것으로 안다. 소감은?)
= 70년부터 교수직을 시작했으니 외국에 나갔을 때를 빼면 33년 교수생활을 한 셈이다. 교수 사직서를 냈지만, 내가 애착을 갖고 있는 ‘인간학’ 등의 강의는 강사로서 계속하겠다. 강의실을 들어가면 고기가 물을 만난 듯 기분이 좋다. 나는 강의 전 학생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나에게 뭘 배울 생각을 하지 말라고. 무엇을 가르치냐도 중요하지만 같이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답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답을 찾는 자다. 그리고 첫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주관심사가 무엇인지 적어내도록 한다. 속에 있었던 얘기들을 하는데 관심사가 다양하다. 지금까지 모은 것만 해도 상당한데 언젠가는 책으로 엮고 싶다.

- (총장에서 강사로 강등된 것인가?)
= (웃으며) 모자보다 머리가 중요하다. 지위추구보다 알맹이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 (이사회에서 참석인원의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 나무에 비유하자면 좋은 줄기, 둥치, 토양, 뿌리 등 모든 게 다 중요하다. 그 중에서 이사회는 뿌리 역할을 한다. 학교는 총장과 교수가 맡아 운영하는 것이고, 이사장은 자주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에서 서로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지성의 문화를 뒷받침하는 것이 이사회의 존재 이유다. 학문공동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이사장으로서 지혜를 모아 산파역할을 하겠다. 나라의 미래를 보려면 대학을 보면 된다고 하듯이 대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 (요즘 대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 긍정적으로 본다.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대학을 다녀봤다. 전세계 대학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도전을 받고 있다. 젊은이들은 자유 분방하고, 잠재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자기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지금 대학생들이 10-20년 후에는 지도자가 된다. 자기밖에 모르는 젊은이들이 사회, 국가, 지구 공동체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겠나.

-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나?)
= 결국 교육이 문제다.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도록 교육하는가 자문해보면 대답은 아니다. 오늘날 남과 함께사는 가치 교육은 실패했다. 남과 함께하는 남을 위한 인간, 열린 교육이 필요하다. 현재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 문화대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을 검토해야 하는데, 과학 및 기술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은 절름발이다. 생명을 존중, 봉사하는 것을 중시하는 가치 육이 이뤄져야 한다.

- (구체적으로 교육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
= 잘못된 경쟁이 판친다. 내가 살기위해서 남을 죽일 수 있다는 가치를 가르친다. 남과 함께 남을 위해서 못 살아봤기 때문이다. 대학동안 1백40학점을 수강하지만 진지하게 토의하고 배우는 중심가치에 대한 교육은 없다. 대학 4년동안 기술적인 부분에 치중한다. 과거 학생들의 지도 이념은 주체사상과 막스·레린주의였다. 지금 학생들은 이런 것을 전혀 모른다. 문화 충돌시기에 대학에서 생명가치와 공동선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교육이 요청되는 데 잘 안된다. 그 분야에 교수 및 전문가가 없다. 중심가치가 없는 상태다.

- (진보와 보수 등의 갈등은?)
=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가 바람직한가 아닌가하는 점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는 많은 가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개혁 대 반개혁, 물질가치 대 정신가치, 어떻게 새로운 접합을 이루냐가 중요하다. ‘썩음’과 ‘삭음’은 서로 닿아 있다. 썩음으로 보면 집단이기주의와 죽음의 문화가 탄생할 뿐이고, 삭음으로 보면 용서와 화해로 해결 할 수 있다.

- (요즘 들어 충돌이 폭발하는 이유는?)
= 닫혔던 뚜껑이 열려서다. 문민정부 들어 자유로워졌지만, 문화는 축척된 덩어리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거다. 그런데 아직 한국 사회는 질적 도전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 충돌이 커진다.

- (예를 들어 노사갈등은 어떻게 보는가?)
= 노동없는 자본없고, 자본없는 노동없는 것이다. 생산과 분배에 동시에 참여해야 문제가 안 생기지 생산에만 참여하고 분배가 없어도, 생산은 없고 분배만 참여해서도 안된다. 공산주의는 하향평준화라고 실패로 결론이 났고, 자본주의 역시 시정되어야 한다. 공동선의 가치를 추구하여 질적 갈등을 풀어가야 한다.

-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은?)
= 이것은 힘으로 밀어붙이기다.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힘의 원리다. 힘이 목적이 되면 자악과 타악,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결과다. 이렇게 문제를 풀어서는 안된다. 둘째는 쾌락의 원리다. 미국이나 유럽선진사회 역시 이런 사회적 현상을 경험했다. 이는 실존적 공허감을 낳는다. 먼저 결과만 얻으려는 것은 공허하다. 이것도 무의식적인 집단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의미의 원리다. 이것이 문제를 풀어가는 올바른 원리다. 더 높은 가치를 향해 마음을 열고 새로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사관계를 힘으로 풀면 노사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쾌락의 원리로는 해결이 안된다. 의미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문제를 풀어야 화합을 이룰 수 있다.

- (문제를 풀어가는 바람직한 방법은?)
= 문제를 풀기 위한 중심가치가 없다. 대형사고가 나면 가치의 축이 무너졌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가치는 무엇인가. 생명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파괴적인 행동을 멈춰야 하고, 공동선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또한 연대성의 가치 추구해야 한다. 노사갈등도 그렇고 NEIS문제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겪는 일종의 홍역일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문화·가치 충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명가치와 공동선에 바탕을 둔 교육이 필요하다.

- (과거 ‘주사파’발언 등을 들어 학생들은 이사장 취임을 반대한다고 하는데...)
= 일부다. 80-90% 학생이 찬성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주사파가 있었다. 당시에 주사파 410여명을 내가 일일이 다니면서 만나보았다. 깊이 빠졌다가 나중에는 실상을 알고 모두 후회하더라. 지금은 한국이 발전하고 북한과의 교류가 증대되어 그들의 허상을 알게 되면서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숫자가 많이 줄었다. 아직 존재하는 이들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적화통일과 계급투쟁의 본심을 감추고 있다. 한총련 이사회내에도 거의 없어졌다. 과거에는 독재타도 외치면서 밖의 적과 싸우느라 주체사상이 퍼지기 쉬웠으나 지금은 내부의 적과 싸우느라 주체사상이 스며들 틈이 적어졌다.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을 분명하게 포기한다면 한총련 합법화를 지지한다.

- (서강대가 학교의 규모가 작아 경쟁에서 밀린다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서는?)
= 서강대는 교육을 중시한다. 학부모와 졸업생 모두 노력하고 있다. 양은 중요하지 않다. 대학교는 컬리지(college)에서 유니버시티(university), 멀티버시티(multiversity)로 가는데 장소가 문제가 아니다. 네트워크를 통한 링크 중요하다. 예수회 소속 대학이 226개나 있는 서강대가 그런 면에서 유리하다. 또한 서강대는 현재 한국 대학들이 외면하는 가치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대학은 문화의 산실로서 풍향계가 되어야 한다. 서강대가 이같은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 (기여입학제에 대한 입장은?)
= 과거 156개 총장이 모였을 때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 안 주면 돈 있는 학생들에게 돈받아서 가난한 학생들 도와주면 좋은 것 아니냐는 얘기를 꺼냈을 때 서울대를 비롯한 연고대 등 5-6개 대학의 총장들을 환영했다. 그렇지만 그외 대학은 기여입학제가 시행돼봐야 돌아올 것이 없다며 반대했다. 교육계 내부에서도 아직 정서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 (노무현 대통령과 소위 ‘코드’가 맞지 않아 이사장으로서 기금 모금에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는데...)
= 요즘 기업체가 다 어렵다. 펀딩(funding)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낮은 코드가 아닌 높은 코드를 맞추면 된다. 근본적이로 국가공동체를 위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코드로 맞추면 된다. 공동선의 가치와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코드를 맞춰야 한다. 노 대통령은 화해의 가치를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해 한국 사회의 물질적·정신적 갈등을 극복하는 산파역할을 해야 한다.

- (노무현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 지난 번 미국방문에서 얻은 외교적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노대통령은 솔직하고 직선적인 면에서 독특한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다. 그것이 장점이지만, 때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참여정부는 코드가 맞는 사람들만의 ‘참여’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대통령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겨우 취임 1백일이 넘었는데 벌써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이르다. 지금은 힘을 실어줘야 할 때다.

- (‘북한 퍼주기’ 논란은?)
= 북한은 투명성 있게 도와줘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우리가 껴안아야할 우리의 민족아니냐. 목욕물 버리면서 애까지 버려서야 되겠나.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햇볕은 부분적으로 실패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자신도 햇볕정책의 피해자다. 북한에 퍼주고도 결국 얻어낸 것이 없다. 북한이 金 전 대통령을 이용하고 버린 꼴이다. 투명성이 확보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대북송금 특검이 진실을 낱낱이 밝히돼 국민화합 차원에서 金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는 말아야 한다.

- (지난해 미군 무한궤도 차량에 치어 숨진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여중생 죽음에 관해 들었을 때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계기로 소파(SOFA)도 개선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반미와 미군철수를 외쳐선 안된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북한에 결국 넘어가기 때문이다. 북한 세력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과소 평가 말아야 한다.

이철재·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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