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커플의 재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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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엔 또 어떤 집에서 부부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드잡이를 했을 지, 또는 한숨을 토하면서 베개를 낀 채 옆방으로 옮기고, 혹은 돌아오지 않는 배우자를 애타게 기다리다 증오의 칼날을 세웠을 지. 지금 이 시간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은 도심 한켠의 러브 호텔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가린 채 도둑처럼 연정(戀情)을 태우고 있을까.

결혼은 미친 짓인가? 한 남자(여자)가 한 여자(남자)만 평생 해바라기하며 사는 건 부질없는 짓인가? 우리의 결혼제도, 즉 일부일처제가 요동치고 균열하고 있다는 경보가 사방에서 울린다.

TV나 여성잡지,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나서 '부부 갈등 이렇게 이겨내세요'라며 충고를 해대지만, 이건 마치 대학입시와도 같다. 아무리 조언을 충실히 따라도 합격생과 불합격생은 일정 비율로 나오게 돼 있듯, 알콩달콩 사는 부부와, 불화로 지새는 부부의 비율은 크게 변하지 않는 듯 하다.

그렇다면 입시가 그렇듯, 우리의 결혼 제도도 구조적으로 문제와 모순을 안고 태어난 게 아닐까. '바로 그렇다'고 이 책(원제 Inventer le Couple)은 주장한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젊은 연인들이 결혼하도록 내버려두는가? 어차피 그들 중 30%는 이혼할 테고 또 다른 30%는 불만족 속에서 현상유지에 급급할 터인데 말이다".

이 책은 위기에 처한 결혼제도에 종합진단을 내린다. 저자는 우선 동물행동학을 빌려 일부일처제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준다. 동물 세계에선 포유류의 4%, 영장류의 18%만 일부일처이고 또 이런 종들은 대개 멸종 위기에 처한 소수집단이라는 귀뜸이다.

더구나 인간과 가까운 아프리카 유인원, 즉 고릴라나 침팬지는 일부일처를 따르는 경우가 전혀 없다. 그는 서양의 일부일처제는 유대-기독교 문화가 강요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본성과 욕구를 거스르는 가혹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전통적인 결혼제도는 여성의 희생에 기대면서 외견상으론 견고한 듯 보였다. 하지만 최근 30여년간 상황이 바뀌었다. 피임.낙태를 통해 여성은 원치 않는 임신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여성이 결혼과 성적 관계에서 주체로 우뚝 서자 남성은 더 이상 그들을 울타리에 가두기가 힘겨워졌다. 애정과 관능이 충족되지 못할 때 여성은 언제든 뛰쳐나갈 태세를 갖춰버린 것이다.

장수도 변수가 됐다. 19세기엔 수명이 짧아 평균 결혼 기간이 20년을 채 못 넘겼다. 오늘날엔 40,50년 을 넘기기가 예사다. 그러다 보니'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해로하는 대신 새 짝을 만날 기회가 늘어 났다.

이처럼 일부일처제는 자연적으로나 문화.사회적으로 유일한 해법도, 권장할 만한 제도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현대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일부일처의 커플로 살아가려는 욕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서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열린 커플'을 지향하자"고 제안한다.

책에 따르면 우리는 대부분 '닫힌 결혼'에 매어있다. 즉 부부가 같은 친구를 사귀어야하고, 같은 여가를 즐기고, 다른 이성에게 끌리는 법이 없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1+1=1'이라면서 자신의 내부조차 배우자에게 내주는 시늉을 한다. 저자는 이런 관계는 자기 발전 욕망을 포기한, 지극히 유아적이고 퇴행적이라고 꼬집는다.

반면 '열린 커플'은 '1+1=2'을 순순히 인정하고 배우자의 개인적인 삶을 내버려두는 관계이다. 이들은 결혼=합일이라는 가짜 신화에서 벗어나 욕망과 충동의 자유로운 흐름을 체험한다. 단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 상대에게는 진실해야 한다.

일부일처제의 탄생과 그 부정적인 결과를 꼼꼼히 고찰해 온 데 비해 대안은 다소 싱겁고 맥빠지기까지 한다. 구조적인 문제라 해놓고 개인의 의지와 각성에서 해답을 찾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성적 행위를 동물의 연장선에 놓고 보는, 사회생물학에서 끌어온 듯한 논리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사실 인간의 성은 동물적인 본능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발정기에만 교미를 하는 동물의 행동양식을 인간의 그것과 같은 저울에 놓고 볼 수는 없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성적 행위는 본능보다는 환상(幻想)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약점을 빼면, 이 책은 사랑과 결혼의 기원은 어디이며 본질은 무엇인가를 엿볼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독할 만하다. 고되도다 사랑이여, 결혼이여!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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