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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나이트 샤말란의 공포는 다시 시작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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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M 나이트 샤말란의 공포는 다시 시작될까
‘식스 센스’ 감독의 신작 ‘더 비지트’

아마 M 나이트 샤말란만큼 ‘준비된 혹평’에 시달려야 하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영화 역사에 오래도록 회자되고도 남을 충격적 반전을 선사한 ‘식스 센스’(1999)의 상업적·비평적 성공 이후, 감독의 신작을 평하는 기준점은 당연하다는 듯 그 영화에 맞춰지기 일쑤였다. 반전이 있는지 없는지, 전작보다 나은지 아닌지. 샤말란 감독은 불행하게도 영원히 출세작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이후에 그가 만든 모든 영화들이 억울하게 저평가되기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솔직히 몇몇 영화는 감독의 영혼이 털리도록 쏟아지는 혹평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간 샤말란 감독에게 여러모로 실망해 왔다면, 지금은 그 마음을 다시 기대로 돌려도 좋을 때다. 감독의 신작 ‘더 비지트’(원제 The Visit, 10월 15일 개봉) 이야기다.

어린 남매가 초대를 받고 일주일간 시골에 있는 조부모의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누나 베카(올리비아 데종)는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찍겠다며 손에서 캠코더를 놓지 않고, 동생 타일러(에드 옥슨볼드)는 앉으나 서나 랩 연습에 여념이 없는 철부지다. 남매가 조부모를 만나는 것은 태어나 이번이 처음이다. 남매의 엄마(캐스린 한)는 15년 전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와 크게 다투고 집을 뛰쳐나온 뒤, 단 한 번도 그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연락해 온,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조부모와 보내는 일주일. 베카는 이 시간을 기록해 다큐멘터리로 완성하는 것만이 가족 화해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휴대전화 전파조차 터지지 않는 곳이지만, 푸근하게 맞이하는 조부모를 보며 즐거운 휴가를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푼 남매. 그러나 그 기대는 곧 피가 거꾸로 솟는 공포로 뒤바뀐다. 밤마다 조부모의 이상 행동을 목격한 남매는 이 집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한다.

-제한된 공간을 이용한 긴장감

당초 이 영화는 ‘선다우닝(Sundowning)’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프로젝트다. 노인 환자 혹은 요양이 필요한 사람이 밤에 일으키는 불안 증세를 뜻하는 단어다. 이는 ‘더 비지트’의 중요한 소재다. “원래 두 분이 좀 괴짜였다”며 남매의 불안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엄마와, 약속한 취침 시간인 오후 9시 30분이 지나면 기다렸다는 듯 소름끼치게 굴기 시작하는 조부모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린 남매가 겪는 공포. 샤말란 감독은 ‘간단한 장치’들을 통해 차근차근 그 공포의 단계를 높여간다.

간단한 장치란 필연적으로 이 영화의 프로덕션에서 기인했다. 제작비는 500만 달러(약 58억원). 그간 샤말란 감독이 찍었던 영화 중 최저에 가까운 금액이다. 실제로 샤말란 감독은 오랜만에 대형 영화 제작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더 비지트’의 시나리오를 썼다. “넉넉하지 않은 예산 덕분에 더욱 창의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됐다”는 그가 떠올린 방식은 미니멀리즘이다. 대부분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인 데다가, 극 중 상황상 남매는 취침 시간이 지나면 방에 감금되다시피 한다. 1층 부엌과 거실, 2층 복도 및 남매가 머무는 방, 현관 밖 공터와 창고, 의문의 지하실 정도가 이 영화가 다루는 공간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폐쇄 공간에서 발생하는 공포. 샤말란 감독은 이를 적재적소에서 활용한다.

베카가 다큐멘터리 꿈나무라는 설정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실제 기록이 담긴 영상을 보는 듯한 설정의 다큐멘터리) 방식의 촬영을 가능케 했다. 이 영화에는 베카 남매가 촬영한 영상과 인물들을 3인칭 시점에서 바라보는 영상이 뒤섞여 있다. 두 가지 촬영 스타일을 오가며 완성된 영상은 극 중 인물과 관객이 느낄 공포감 사이의 거리를 효과적으로 좁힌다. 카메라 앵글 역시 당연히 아주 자유롭다. 샤말란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은 뒤 “앞으로 저예산 영화만 제작하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규모가 큰 영화를 완성하려면 평균 3년 정도 걸리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각본으로 쓰고 촬영한 뒤 완성하기까지 일정한 동력으로 달려가기엔 너무 긴 시간”이라는 것이다. ‘더 비지트’가 힘이 달리는 법 없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 충실하게 달려간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디어와 유머가 돋보이는 영화

어떻게 보면 ‘더 비지트’는 그간 샤말란 감독이 여러 영화에서 시도했으나 잘되지 않았던 것들의 조각을 모아 알맞은 형태로 조합한 퍼즐처럼 보이기도 한다. ‘빌리지’(2004)의 한정된 공간(마을), ‘레이디 인 더 워터’(2006)의 동화적 감수성, ‘애프터 어스’(2013)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어린아이의 기지 같은 것들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특히 동화적 감수성이 두드러지는데, 때문에 이 영화는 일견 ‘헨젤과 그레텔’ 같은 동화의 현대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난 9월 북미 개봉 당시 뉴욕타임스는 ‘캔디 대신 캠코더를 지닌 헨젤과 그레텔’이라는 표현을 썼다. 꽤 적절한 설명이다. 예고편에도 등장한, “오븐에 들어가 청소 좀 해주겠니?”라는 할머니 나나(디애나 듀나건)의 수상한 요구 역시 꽤 직접적으로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를 떠오르게 하는 면이 있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이 영화의 유머 감각이다. ‘더 비지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색하는 호러가 아니다. 극의 흐름과 엇박자를 타면서 간간이 튀어나오는 유머가 신선한 재미를 만든다. 호러도 아니고 코미디도 아닌 이 독특한 흐름은 편집 과정에서 완성됐다. 샤말란 감독에 따르면 ‘더 비지트’의 개봉 버전은 여러 방향성을 절충한 편집본이다. 그는 총 세 가지 버전의 편집을 완성했는데, ‘순수한 코미디’와 ‘순수한 호러’ 그리고 개봉 버전인 ‘그 사이’가 있다.

‘더 비지트’는 분명 적은 예산, 단순한 스토리로 완성된 소품 같은 영화다. 샤말란 감독의 전체 필모그래피 중에서 최고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진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감독이 선보였던 그 어떤 영화보다 만듦새가 안정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간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은 아니지만, 이미 호러 장르에서 흔하게 쓰였던 방식들을 나름 단단하게 잘 뭉쳐 만든 느낌의 영화라고 할까. 어느덧 샤말란 감독의 영화라면 자동 반사적으로 기대하게 되는 반전 역시 있지만, 영화 스스로 그 반전에 발목 잡혀 극 전체를 무너뜨리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더 비지트’는 이름만으로 호평받고 다시 같은 이유로 혹평에 시달리던 시기를 지난 샤말란 감독이 지금,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블록버스터의 외피가 아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그리고 곱씹을수록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숨겨진 플롯이다. 드디어,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돌아왔다.

글=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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