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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원전 폐기물 고이 모셔라 … 1만 년은 끄떡없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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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핀란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에서 직원이 처분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민상 기자]

“여기 산소 공급 장치 보이죠.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이곳에서 17시간 버틸 수 있습니다.”

핀란드 고준위 처분장 건설 현장
지하 455m에 60~70㎞ 나선형 동굴
폐기물 보관할 2800개 구멍과 연결
지진도 견디는 2억원짜리 구리원통
주민들 “관련 정보 공유 … 걱정 안 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차로 3시간 가량 떨어진 서남부 지역 에우라요키(Eurajoki)에 지하 455m까지 파놓은 인공 동굴. 방사성 폐기물 관리 사업체인 포시바(Posiva) 직원 얀 레이호넨(46)은 비상 대피 장소를 안내하면서도 “돌덩이가 떨어질 수 있으니 안경을 써야 한다” “몸이 이상한 점은 없느냐”며 시종일관 방문객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동굴은 핀란드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용하고 배출된 사용후 핵연료를 처분해 놓을 공간으로 만들었다. 11월 핀란드 정부의 마지막 승인 단계 절차가 끝나면 이곳이 세계 최초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 된다. 12일 본지 기자를 초청한 직원에게 “방사성 차단복은 입지 않아도 되느냐”고 물으니 “정부 승인이 떨어지면 동굴을 더 확장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폐기물은 2020년에 들어 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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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압력과 누수 등 각종 실험을 위해 455m 깊이의 동굴을 나사 모양으로 네 바퀴 돌려가며 4㎞ 정도 뚫어놓은 형상이지만 최종 처분 단계까지 60~70㎞ 길이의 거미줄 모양으로 규모를 늘린다. 나뭇가지 형태로 뻗은 마지막 동굴에는 바닥에 8m 깊이의 원형 구멍이 2800개가 뚫린다. 여기에 개당 20만 유로(약 2억5680만원)하는 구리 원통(캐니스터)이 들어간다. 구리 원통에는 사용하고 배출된 핵연료봉과 방사성 차단물이 담긴다.

 구리 원통은 동굴에 물이 새거나 지진이 일어나도 견딜 수 있도록 두께 5cm에 길이 5m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 폐기물 처분장은 앞으로 1만 년은 버티도록 설계됐다. 1만 년은 인류가 피라미드를 지은 시기보다 두 배를 더 버텨야 하는 기간. 직원 키모 레토(42)는 “빙하기가 다시 와 얼음이 3~4㎞ 위로 쌓여도 견딜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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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는 첫 원자력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한 1977년부터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1983년부터 네 곳을 후보지로 선정해 안전한 지질 구조인지 조사를 시작했다. 환경 조사와 주민 합의를 거쳐 최종 선정된 곳이 에우라요키다. 에우라요키의 폐기물 처분장 부지 옆에는 원자력 발전소 두 기가 운영 중이다. 야네 모카(43) 포시바 대표는 “이곳에 채용된 에우라요키 시민도 상당하다. 정보를 서로 숨기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근 주민도 거부감이 없었다. 어린이집 교사인 카린 라우릴라(37)은 “인터넷과 주민 공청회로 원자력 방사성 정보는 수시로 들을 수 있다”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소식은 들었지만 우리 동네에 그런 자연 재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전기회사 지멘스(Siemens)에서 3년간 근무했다는 주시 일로넌(35)은 “전기 기술을 배운 내가 봐도 우리 마을의 폐기장 안전 기술은 뛰어나다”며 “오히려 일자리와 지역 예산이 늘어 도시는 더욱 성장할 수 있어 만족한다”고 말했다.

 핀란드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인 배경도 한몫했다. 러시아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는 에너지 자원도 독립하려 했다. 원자력 발전소를 짓기 전에는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석탄과 가스에 에너지를 의존해야 했다. 1970년대 핀란드는 원전을 세우면서 미국과 프랑스의 원자력 폐기물 관리 기술을 빠르게 접목시켰다. 지금은 원전 4기를 운영하면서 얻는 전력이 전체 발전량의 30% 가까이 차지한다. 안정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제지와 전자 산업도 발전해 1970년 2467달러에 불과했던 핀란드의 1인당 국민총소득(GDP)은 지난해 4만9541달러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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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 문제가 발등에 불이다. 8월 경주에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장을 준공해 한시름 놓았지만, 2016년 고리 원전을 시작으로 고준위 폐기물 처분 공간은 꽉 찬다. 폐기물 처분 간격을 좁히고 여유가 있는 원전으로 폐기물을 옮기더라도 2028년이면 완전 포화 상태가 된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장을 지낸 홍두승 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처분 공간이 차면 원전을 닫아야 한다”며 “효과적인 에너지 자원을 더 이상 찾지 못한 이상 공론화 절차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홍두승 전 위원장은 6월 사용후핵연료 관리에 대한 권고안을 정부에 보고했다. 권고안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법제화된 절차에 따라 공론조사·토론회·라운드테이블·설문조사 등을 통해 2만700여 명의 의견과 온라인상 35만여 명의 의견을 담아낸 보고서다. 보고서는 정부가 2051년부터는 고준위 핵폐기물의 영구처분시설을 운영하도록 권고했다.

 정부도 7월 사용후핵연료 관리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TF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과 관련된 계획을 올해 연말까지 마련할 예정이다. 원전을 해체하는 기술 개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6163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이종인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이사장은 “1965년부터 지금까지 10개국에서 핀란드와 같은 지하연구시설을 운영 중”이라며 “저장 공간이 충분하지 못한 한국은 지하연구시설 운영과 같은 기술을 빠르게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핀란드 에우라요키=김민상 기자 kim.minsang@joongang.co.kr

◆고준위·중저준위 폐기물=원전 내에서 사용된 작업복·장갑·부품 등은 방사성 물질 함유량이 미미해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이라 불린다. 원자력 발전 뒤 남은 연료는 방사성 물질 함유량이 높아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로 분류된다. 사용 후 연료를 재처리하고 남은 부산물도 고준위 폐기물이다. 재처리 과정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이 나오기 때문에 한국은 다른 방법(건식 재처리)으로 기술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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