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코박터균, 빈혈 일으켜 아이 성장 막아…개인식기 써라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4면

기사 이미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은 여학생에게 철분 결핍성 빈혈을 일으키거나 성인에게 기능성 소화불량을 유발한다. [사진 프리랜서 박건상]

1년 전 극심한 빈혈로 병원을 찾은 강은지(16)양. 그녀는 빈혈의 원인이 다름 아닌 ‘위(胃)’에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철분을 투여받았는데도 어지럼증이 나아지지 않아 의사의 권유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 발견된 것이다.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는 “위 점막에 사는 헬리코박터균 때문에 철분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다. 은지양은 제균 치료를 하며 유산균·브로콜리 같은 식품을 챙겨 먹고, 식사 시 개인그릇을 사용하는 등 위생적인 생활을 했다. 지금은 헬리코박터균이 치료됐고, 빈혈도 함께 나아졌다.

가족건강 위협하는 위 속 세균

한국인 두 명 중 한 명의 위(胃)에는 세균이 산다. 위 점막에 붙어 증식하며 각종 위장질환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이다. 균을 발견한 미생물학자인 배리 마셜 박사는 ‘산성이 강한 위에는 균이 살 수 없다’는 통념을 깨뜨리며 200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거머쥐었다. 다른 세균은 위의 강한 산성 때문에 사멸하지만 헬리코박터균은 자신의 주위를 중성에 가깝게 만들어 생존한다. 척박한 위에서 살아가는 헬리코박터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치료를 받아도 쉽게 재발해 가족 건강을 위협한다. 김 교수는 “헬리코박터균은 가족 내 감염이 주된 경로”라며 “청소년의 성장을 방해하고 성인에게는 다양한 위장질환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치료 방법이 까다로워 잘 재발하므로 감염·재감염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빈혈·복통 유발해 성장 방해

헬리코박터균은 주로 어릴 때 감염돼 평생 유지된다. 김 교수는 “소아·청소년기에는 위산 분비가 적고, 면역기전이 왕성하지 못해 헬리코박터균이 살기에 최적”이라고 말했다. 헬리코박터가 위 점막에 자리 잡으면 면역반응으로 염증이 생긴다. 이 염증에서 사이토카인 같은 독성 물질이 분비돼 위세포를 훼손한다. 균에 감염된 상태가 오래되면 만성 염증뿐 아니라 몸 이곳저곳에 이상 신호를 보낸다. 헬리코박터균은 어린이 성장을 방해한다. 김 교수는 “헬리코박터균이 원인인 철분 결핍성 빈혈은 성장의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된 학생은 철분 결핍성 빈혈을 앓을 확률이 미감염 청소년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특히 철분 소비가 급증하는 여학생이 헬리코박터균에 감염되면 철분 결핍성 빈혈로 악화하기 쉽다. 김 교수는 “헬리코박터균이 있는 사람은 정상보다 키가 작을 확률이 40% 높고, 빈혈이 있을 경우 더 심하다는 조사도 있다”고 말했다.

기사 이미지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위 점막에 기생하는 박테리아로 서너 가닥의 편모를 지닌 0.4~1.2㎛(1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m) 크기의 나선형 균이다. 위의 강한 산성을 중화시키는 요소 분해 효소(우레아제)가 있어 자신의 주변을 중성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어 생존한다.

헬리코박터는 소아 만성 복통의 원인 중 하나다. 국내에서는 만성 복통을 호소하는 6세 이하 어린이의 11%, 13세 이상 어린이의 43%가 헬리코박터균이 원인인 것으로 보고된다. 김 교수는 “성장기에 만성 복통이 생기면 식욕부진으로 이어져 성장 장애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소화불량·위암 유발하는 복병

헬리코박터균은 성인에게 소화불량뿐 아니라 위암까지 유발하는 위장질환의 복병이다. 먼저 헬리코박터균 때문에 기능성 소화불량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박진수(36)씨는 헬리코박터균을 없애고 나서야 소화불량이 나아진 사례다. 박씨는 “특별한 위장질환이 없는데도 밥을 먹고 나면 늘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안 돼 소화제와 위장약을 달고 살았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건강검진에서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돼 치료를 받았다. 김 교수는 “최근 기능성 소화불량증 원인을 헬리코박터균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가이드라인이 나왔다”고 말했다. 헬리코박터가 원인인 소화불량이 상당수란 얘기다.

균 감염 상태가 지속되면 만성 위염, 위축성 위염으로 악화할 수 있다. 그러다 점막세포가 소장·대장의 세포처럼 변하는 장상피화생으로 이어진다. 위축성·장상피화생성 위염이 있으면 위산 분비가 줄고 위암 확률을 높인다. 소화기내과 홍성수(비에비스나무병원장) 전문의는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되는 헬리코박터균의 95%는 동아시아형 독성 인자로 위암 발생률을 150%나 높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RAC)는 헬리코박터균을 1등급 발암 요인으로 규정했다. 홍 전문의는 “헬리코박터균을 완전히 치료하면 위암 발생률이 3분의 1로 줄고, 위암 사망률은 4분의 1로 낮아지는 것으로 보고된다”고 말했다.

헬리코박터균이 위장질환 외에 다른 질병 위험도 높인다는 연구가 잇따른다. 홍 전문의는 “동맥경화·치매·편두통같이 소화기능과 관련 없는 병에도 영향을 준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균에 저항하는 물질이 혈관을 좁혀 동맥경화·심근경색 유발 확률을 높인다는 연구(영국 세인트조지대학병원), 또 헬리코박터균 보균자가 녹내장 위험이 두 배 높다는 연구도 나왔다.

재감염 잦아, 유산균 챙겨 먹기

헬리코박터균이 있는 사람이 모두 위장병에 걸리는 건 아니다. 헬리코박터균 보유자 중 80%는 만성 위염이 있고, 이 중 20%에서 위암·위척성염·장상피화생·소화성궤양 같은 병을 일으킨다. 위암 직계가족이 있는 사람, 위축성 위염, 소화성 궤양, 조기 위암, 위림프종, 기능성 소화불량, 청소년기 철분 부족성 빈혈을 동반하면 제균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유럽·미국은 위암 가족력이 있거나 위장장애가 있으면 제균 치료를 권한다. 일본은 2013년 위암을 뿌리뽑기 위해 ‘모든 헬리코박터균 보균자를 대상으로 제균 치료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그런데 헬리코박터균의 제균 치료율은 70~80%에 그친다. 균이 위 점액에 숨어있는 탓이다. 일시적으로 균이 제균된 것처럼 보이다가 1년 이내에 재발현하는 경우가 많다. 김 교수는 “길쭉한 모양의 균이 공처럼 변해 동면하는 모양으로 기절해 있다가 주위 조건이 좋아지면 길쭉한 모양으로 되살아난다”고 말했다.

제균 치료를 하더라도 생활습관을 함께 개선해야 재감염·재발현을 예방한다. 헬리코박터의 천적 중 하나는 유산균이다. 홍 전문의는 “유산균이 만들어내는 박테리오신이란 물질이 헬리코박터균 성장을 억제한다”고 말했다. 헬리코박터균은 산성이 강한 위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레아제라는 물질을 분비하는데 박테리오신이 이 효소의 활동을 방해한다. 홍 전문의는 “헬리코박터 보균자에게 항생제 치료와 함께 유산균을 투여했더니 균의 87%가 사라졌다”며 “항생제 치료만 한 그룹의 치료율(70%)보다 높았다”고 말했다.

헬리코박터균은 가족 내 감염이 주된 경로다. 헬리코박터균이 있는 사람의 자녀·배우자·형제 간에 감염이 잘 된다. 음식물을 씹어서 아이에게 주거나 입으로 베어 먹이는 건 삼간다. 가족끼리 식사하더라도 개인접시를 사용한다. 수저·그릇·컵·젖병은 씻은 후 잘 말려서 사용한다. 헬리코박터는 습한 환경을 좋아한다. 건조한 상태만 유지해도 오래 생존하지 못해 전염을 예방한다.

기사 이미지

이민영 기자 lee.minyo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