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가 털어놓는 이미지 연극의 모든 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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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6 면

현대 공연예술계 거장 로버트 윌슨(79)이 4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초청작 ‘셰익스피어 소네트’(15~17일)와 광주 아시아예술극장 시즌 개막작 ‘해변의 아인슈타인’(23~25일)을 잇달아 올리기 위해서다. 한국팬들은 수잔 손탁이 “위대한 예술적 창조 과정의 지표”라 극찬한 로버트 윌슨의 예술세계를 그 초기작과 최근작을 통해 제대로 확인하게 됐다.


‘융복합 예술’이 우리 문화계 키워드로 떠오른 지금, 로버트 윌슨을 재조명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세계 공연계 흐름을 이미지 중심으로 옮기며 공연 예술의 경계를 없애고 예술 형식의 개념 자체에 변혁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연극·오페라·무용 등 장르를 아우르는 연출가이자 안무가·배우·화가·조각가·비디오 아티스트·음향에 조명 디자이너까지 경계 없이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레이디 가가와 협업한 초상화를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하기도 했다.

윌슨의 무대는 대사에 의존하지 않는 강렬한 미장센으로 유명한데, 스스로 ‘조명이 가장 중요한 배우’라고 말할 만큼 빛과 그늘의 조화로 시각예술에 가까운 무대 언어를 구사한다. 이런 이미지극을 개척하게 된 계기가 흥미로운데, 사실 그는 10대 시절 언어장애자였다. 장애를 이겨낸 뒤 뇌 장애아들을 돕다가 영화 속 슬로우모션과 같은 움직임을 통한 의사소통의 효과에 주목하게 됐다. 1970년 선보인 대사 한마디 없는 연극 ‘벙어리의 눈짓’이 윌슨 이미지극의 탄생이다.


건축과 미술을 전공한 그는 조명과 무대 디자인, 움직임 구성을 연구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학을 구축해 나갔다. 작곡가 필립 글라스와 협업한 ‘해변의 아인슈타인’(1976)을 아비뇽 페스티벌에 선보여 일약 스타가 됐다. 팔순이 다 된 지금도 세계 주요 극장을 돌며 활약중이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는 브레히트가 이끌던 극단 베를린 앙상블에서 2009년 초연한 작품. 실험정신과 비판의식 면에서 진정한 브레히트의 후예로 꼽히는 윌슨은 베를린 앙상블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다. 지금도 베를린 앙상블의 정기 레퍼토리인 이 작품은 희곡도 아닌 시를 형상화했다. 사랑의 고통, 인간의 필멸, 시의 영원성을 다룬 소네트 25편에 윌슨의 이미지극이 가진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아낸 아름다운 무대다.


이번 주 공연될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뉴욕타임스가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은 5시간짜리 실험 오페라다. 수학적 혁명의 상징이지만 다시 태어나면 배관공이 되기를 원했던 아인슈타인의 인간적 삶을 내러티브 없이 이미지로만 보여준다. 루신다 차일즈의 미니멀한 안무에 기차와 빌딩, 법정과 침대, 야외와 우주의 이미지가 병치되고, 리듬이 강조된 노래는 1에서 8까지의 숫자와 ‘도레미파솔’까지의 음계를 읊는 게 전부다.


기존에 없던 가변 구조로 지어진 아시아예술극장은 그간 논란이 많았다. 극장측은 연출가의 재량을 펼쳐낼 창의적인 공간이라고 강변해 왔다. 이 거대한 텅 빈 공간이 실물 크기 기차와 빌딩, 버스를 포함해 콘테이너 4대 분의 세트와 첨단 장비로 채워진다. 과연 세계 최고 연출가가 ‘트랜스포머 극장’의 진면목을 보여주게 될지도 관전 포인트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사진 한국공연예술센터·아시아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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