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혐의로 유죄 몰린 伊총리 法 만들어 재판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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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뇌물증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게 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사진) 이탈리아 총리가 자신이 장악한 의회를 이용해 재판을 임기 이후로 연기해 버렸다. 검찰의 기소와 사법부의 재판에 '기소 금지 및 재판 연기 특권법'을 새로 만드는 전대미문의 술책으로 맞선 것이다.

이탈리아 하원은 18일 총리, 대통령, 상.하원 의장, 헌법재판소장 등 다섯명의 최고 공직자에게 사법상 특권을 주는 법안을 승인했다고 영국 BBC방송이 보도했다.

임기 중에는 어떤 혐의로도 이들을 기소할 수 없으며, 이미 시작한 재판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동결하는 게 골자다. 여당과 중도우파연합이 마련한 이 법안은 이미 상원을 통과했다. 대통령의 형식적 서명만 거치면 바로 발효한다.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재판의 진행을 막으려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재판방해법'이라고 비꼰다. 야당들은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밝혔다. 사법부의 불만도 대단하다. '초헌법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베를루스코니는 은행.방송.신문.출판사.AC밀라노 프로축구팀 등을 소유한 이탈리아 최대의 부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맹렬 사업가였다. 정계에 들어오기 전인 1985년에 국영 식품기업 SME가 경쟁 기업에 불하되지 않도록 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동안 밀라노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왔다. 본인은 "좌파가 나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조작한 음모"라며 혐의를 부인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재판 과정을 보면 유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유럽 언론들의 한결같은 전망이다. 증인 살해를 지시했다는 의혹까지 받는다.

여당 측은 이탈리아가 7월부터 6개월 동안 유럽연합(EU) 의장국을 맡게 됐으므로 총리의 체면을 세워주자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번 법안은 유럽의 지도자가 될 총리가 유죄판결을 받아 국가적 망신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반대론자들은 "이런 특권법 자체가 나라 망신"이라고 반박한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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