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의 남자 읽기] 용돈 타는 가장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3면

학창시절 좋아했던 소설책 1백쪽에 비자금을 '예치'했던 C씨. 우연히 책장 정리를 하던 아내에게 덜미를 잡혀 다음달부터 용돈이 삭감되는 운명에 처했다.
10년차 가장 K씨는 술김에 기분좋게 동창들에게 한턱 낸 술값 명세서가 집으로 잘못(?) 날아든 통에 아내에게 카드를 압수당했다. 또 A씨는 대학에 입학한 조카에게 아내 몰래 축하금을 주다 발각당한 뒤 일주일간 돈의 출처를 묻는 아내의 심문에 시달렸다.

C.K.A씨의 고충은 월급을 고스란히 아내에게 맡기고 용돈을 타서 쓰는 이 땅의 수많은 가장을 대변한다. 자신이 번 돈을 자기가 쓰지 못하는 소시민의 현주소다.

자연히 용돈을 받는 남성은 공짜 술자리를 기웃거리거나 촌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반면 부모 돈으로, 돈 잘버는 아내를 둬서, 혹은 뒷돈을 잘 챙겨 공짜 술자리를 제공하는 사람은 보스 행세를 한다. 직장 동료들이 부부동반 모임을 꺼리는 것은 특별 상여금 등 비자금이 들통날까봐 겁나서라는 얘기도 있다.

고정 부수입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일부 가장은 용돈이란 단어 대신 월급은 아내 몫, 부수입은 남편 몫으로 정하고 지내기도 한다. 그래선지 본업보다 부업에 열심인 듯한 가장의 이야기가 회자된다.

한국 남자들이 스스로를 용돈 받는 어린이(?)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쩨쩨해 보일까봐, 재테크는 여성 몫이라, 신경쓰기 싫어서, 돈 쓰기 싫을 때 아내 탓(?)으로 돌리기 위해서 등 정말 다양하다. 모두 조금씩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심리는 무늬만 대장부인 많은 한국 남자가 어머니에게서 받던 용돈처럼 아내에게서도 용돈을 받으며 안주하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가정경제 운영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고픈 '심리적 퇴행'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지출을 결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독립적인 성인이라 할 수 있다.용돈은 경제능력이 없는 미성년자나 노인이 보호자에게서 받는 돈이다. 성숙한 부부라면 믿음과 솔직한 대화로 서로의 개인 지출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 아내에 대한 의존적 심리에서 진정 책임있는 파트너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황세희 전문기자.의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