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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커버스토리] 지도층도 보통사람도 … 365일 만우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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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너무 가난해.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안돼. 울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우리집은 너무 가난해서 요리사.경호원.운전사 밖에 못둔대. (중략)에이, 진짜 짜증나. 대머리 할아버지, 우린 왜 이렇게 가난한 거예요. 가난이 너무 싫어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우리집은 너무 가난해'라는 제목의 컬러링(휴대전화 통화연결음)이다.

이 컬러링은 지난 4월 "29만1천원이 내가 가진 전재산"이라고 주장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법정 진술이 세간의 구설에 오른 직후 선보였다. 벌써 수천여명이 내려받았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정치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결코 믿지 않기 때문에 남이 자기 말을 믿으면 놀란다."(드골)

"정치인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한다."(흐루시초프)

정치인의 말바꾸기나 거짓말은 새삼스럽지도, 낯설지도 않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거짓말도 있다"며 두둔하는 목소리도 있다. 상황에 말을 맞춰야 하는 정치인에게 거짓말은 필요악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사회지도층보다 거짓말을 적게 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경우 일반인들도 하루에 거짓말을 2백번 가량 한다는 연구보고서가 있다. 약 8분에 한번 꼴이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제럴드 젤리슨 박사(정신과)가 20명을 상대로 조사했다. 그는 거짓말을 잘하는 직업인들도 가려내봤다. 정치가.변호사.언론인.세일즈맨.정신과 의사.병원 접수담당 직원.상점 판매원 등이 꼽혔다.

흔치는 않겠지만 심지어 성직자도 거짓말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성추행 혐의로 불려 온 한 종교인이 경전에 손을 얹고서도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더군요. 물론 금방 들통났지만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관으로 일하는 이재석 경사의 말이다.

보통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거짓말은 뭘까. 서울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 근무하는 회사원 30명(남자 17명.여자13명)을 상대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들은 하루 평균 2, 3번 정도 거짓말을 한다고 밝혔다. 거짓말의 내용이나 대상은 각양각색이지만 대부분 누구나 한번쯤 해봤거나 들었음직한 '친숙한 거짓말'들이다. 애교 섞인 거짓말도 있다.

▶밥먹기 싫은 사람이 밥먹자고 할 때- "이미 먹었어요.""따로 약속 있어요."

▶옷 사러온 손님에게- "멋있네요.""정말 딱 어울려요."

▶입점 업체에게- "오늘까지 자료제출 마감입니다."

▶부모님께- "일찍 들어갈게요."

▶딸에게-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옷 안사도 된다."

▶약속 늦었을 때- "지금 가고 있어."

▶오랜만에 연락한 친구에게- "나중에 내가 한번 쏠게."

이들은 또 직장에서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로 "예 알겠습니다""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를 꼽았다.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진다.

결혼 3년차 맞벌이 부부인 최원진(31).성미현(29)씨는 '남편과 아내간에 오가는 거짓말은 필요악'이라며 옹호론을 폈다.

"결혼하고 나니까 거짓말이 훨씬 늘었다. 집에 귀가하는 문제나 돈 얘기가 걸리니까 그런가 보다. 바람을 피운다든지 악의적만 것이 아니면 거짓말은 어느 정도 해도 되는 것 아닌가. 1백% 솔직하면 서로 피곤할 수 있다."(최원진씨)

"맞다. 부부 사이에도 거짓말이 조금 필요한 것 같다. 시댁이나 친정에 줄 용돈을 따로 챙기더라도 모른척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서로가 기분이 안 나쁠 정도의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하다."(성미현씨)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거짓말에 익숙해지고, 거짓말 실력도 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뒤집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지난해 중.고교생 1천7백명, 성인 1천6백명을 조사한 '한국 사회의 도덕성 지표 연구'보고서를 펴냈다. 뜻밖에도 "정직해서 손해를 보기 보다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이익을 얻는 편이 낫다"고 답한 학생들(15.5%)이 학부모들(7.6%) 보다 두배 이상 많았다(어른 응답자들이 설문조사원에게조차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한 초등학생은 우리 사회 전반에 스며든 거짓말 풍토를 이렇게 꼬집었다. "학생회장을 뽑을 때면 후보로 나온 애들을 '우리 반이 빛나게 하겠습니다. 애들을 조용히 시키겠습니다'라고 말해놓고 뽑히면 자기가 더 떠들고 약속 안지키곤 해요.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서울 양전초등학교 3년 이소민양)

한승렬 교수(고려대 문화심리학)는 이런 풍토의 배경에 '상황'과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가 숨어있다고 진단한다. "서구인들은 대부분 상황에 관계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상황이 달라지면 말과 행동도 그것에 맞춰 바꾸려는 경향이 강하다. 좋은 뜻으로 보면 융통성이지만, 달리 표현하면 거짓말이 된다."

표재용 기자

권혁재 전문기자

<사진설명>

거짓말을 하면 코 안의 조직이 충혈되고 가려워져 자꾸 손으로 문지르게 된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은 성추문 증언을 할 때 코를 1분에 26차례나 만졌다고 한다. 눈 깜박이기.시선 피하기.머리 긁적이기.다리 꼬기.침 삼키기 등도 거짓말을 할 때 잘 나타나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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