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미·중 룰 게임 TPP, 시간은 누구의 편인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한우덕 기자 중앙일보 차이나랩 고문/상임기자
기사 이미지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

‘하늘은 높아 새는 자유롭게 날고, 바다는 넓어 고기가 마음껏 헤엄치누나(天高任鳥飛, 海闊憑魚躍)’. 지난해 7월 베이징에서 열린 제6차 미·중 전략대화 대표단을 맞이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건넨 말이다. 소설 『서유기(西遊記)』의 한 구절이다. 이어진 말에 그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광활한 태평양은 미국과 중국 두 나라를 용납할 만큼 충분히 넓다”고 말했다. “양국이 핵심 이익을 존중하면서 태평양을 관리하자”는 얘기였다. ‘신형대국관계’다.

 지난주 타결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시 주석의 ‘신형대국관계’ 제안에 대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대답 성격이다. ‘중국과 태평양을 나눌 뜻이 없다’는 메시지다. 중국으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TPP 장벽’을 쌓아놓고는 한마디 더했다. “중국과 같은 나라가 세계 경제의 규범을 정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말이다. TPP에 양국 간 ‘룰(rule) 게임’의 속성이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성장은 서방의 자유무역 시스템 속에서 이뤄졌다. ‘G2’라는 찬사 역시 2001년 말 성사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덕택이었다. 당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중국과 자유롭게 교역하라, 시간은 우리 편이다(Trade freely with China and time is on our side)’고 거들었다. 중국 경제가 결국 자유 시장경제 시스템에 편입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오히려 중국 편이었다. 중국 상품은 세계 시장을 장악했지만 그들 특유의 국가 자본주의 시스템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도 독자적인 표준을 만들겠다’고 나선다. TPP에는 ‘시간을 다시 미국 편으로 돌리겠다’는 미국의 뜻이 담겼다.

 중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이는 TPP를 버리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을 먼저 선택했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 득실을 면밀히 따지기 위해서는 TPP의 대척점에 있는 중국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택은 둘이다. 첫째 ‘내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일대일로(一帶一路·신실크로드 전략)는 그 상징이다.

 일대일로에는 ‘동쪽에서 조여오는 미국의 경제포위망을 피해 서쪽으로 달리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자원이 풍부한 중앙아시아, 인프라 건설 수요가 많은 동남아시아, 선진 기술을 갖춘 유럽 등이 대상이다. 연말 공식 발족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바탕으로 중국 주도의 경제 권역을 만들겠다는 게 그들의 구상이다. 그런 한편, 동쪽으로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공을 들인다. TPP의 대항마 키우기다. ‘서쪽 일대일로, 동쪽 RCEP’라는 중국의 반(反)TPP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또 다른 선택은 ‘오바마 룰’에 순응하는 것이다. 서방 시스템 속에서 성장해온 중국은 TPP를 마냥 외면할 수 없는 처지다. 오바마의 의도대로 미·유럽 간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이 체결된다면 중국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왕따’ 신세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베이징 일각에서 ‘WTO 가입으로 효과를 봤듯 TPP도 도전해볼 만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장벽은 높다. 지적재산권·환경·정보유통 등은 개선의 여지가 있지만 노동이나 국유기업 등은 체제와 관련된 것이기에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더 과감한 친(親)시장 개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유명 중국 경제 전문가인 니컬러스 라디 피터슨연구소 교수는 언론 기고문에서 “상하이의 ‘자유무역실험구’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TPP가 요구하는 룰이 중국에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다”고 분석한다. 시간은 미국 편, 중국도 결국 TPP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중 ‘룰 게임’의 승자가 누구일지는 시간이 답해줄 일이다. 우리는 다만 그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 이익을 챙길 것인가에 관심을 둘 뿐이다. AIIB의 주요 멤버 중 하나인 우리는 일대일로에서 인프라 투자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중국의 시장 개혁은 우리 상품의 활로를 더 넓힐 수 있다. 한·중 FTA라는 카드를 쥐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우위를 누릴 수 있다. TPP 가입의 득실을 따지면서 한·중 FTA의 과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관리한다면 그들의 게임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한·중 FTA의 국회 조기 통과는 그 시작이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