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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한국사 국정화 주장이 공허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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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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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

홍모(46)씨는 2010년 중학생인 두 아들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떠났다. 아이들을 현지 학교에 보내며 그는 한국 교육과 다른 점을 다수 발견했다. 그중 하나는 교사가 수업 때 교과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씨는 “과학시간에 전류 흐름을 다루며 비디오 세 편을 보여주고 사진·문서 자료를 나눠줬다. 교과서가 없으니 교사가 준비를 더 많이 하더라”고 말했다. 홍씨는 중앙일보 ‘江南通新(강남통신)’이 연재한 ‘엄마가 쓰는 해외교육 리포트’에 이런 소감을 전해 왔다.

 교과서 없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는 이곳만이 아니다. 아들이 미국 미네소타주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문모(50)씨는 “수업은 교과서가 아니라 다양한 내용이 담긴 노트북으로 진행된다”고 소개했다. 학생들은 영어시간엔 독서 후 비평을 하고, 과학수업 땐 주로 실험에 참여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낸 전모(39)씨도 “교과서를 나눠주거나 구입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한국 영어학원에서 ‘미국 교과서’를 쓰더라”고 했다.

 외국 사례를 언급한 것은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정부·여당의 움직임 때문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박근혜 대통령의 소신”이라는 말이 나오는 새누리당에선 1일 역사교과서 개선특별위원회가 꾸려졌다. 김무성 대표는 한국사 국정화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교과서를 국정화해야만 역사 교육이 바로 선다는 주장은 한국 교실의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다.

 국내 고교 수업은 대입에 맞춰져 있다. 서울 한 고교의 역사교사는 “한국사는 수능 암기과목이라 학교 중간·기말고사도 5지선다형으로 낸다. 교과서 내용도 다 가르치지 않고 요약본을 나눠주는데, 검정이든 국정이든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더욱이 2017학년도부터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이 되는데, 현 정부는 ‘수능-EBS 교재 70% 연계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해당 교사는 “다른 과목도 그렇지만 학생들은 교과서보다 EBS 교재를 주로 볼 것”이라고 했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려면 교과서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정부·여당의 우려대로 역사 왜곡이 심각하고 자라나는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시급하다면 다른 방안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그리스에서 네 자녀를 키우는 윤모(46)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뤄지는 역사교육이 인상적”이라고 전했다. 수업에서 신화와 고대 역사를 배우면 그리스 학생들은 관련 유적지로 체험학습을 떠난다. 현장에서 교사의 설명을 들으며 살아 있는 교육을 받는다. 독립기념일이나 민주항쟁일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모든 학생이 관련 내용으로 연극을 하거나 시낭송을 한다. 현 정부가 도입한 중학교 자유학기제 때 학생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을 비롯해 역대 대통령기념관을 방문하는 프로그램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이런 생산적인 대안 대신 국정화만 외친다면 내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둔 여권의 세결집용이란 시각을 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김성탁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