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테너 “힘들어도 포기 안 해 … 노래의 맛 더 알게되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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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세 테너 안형일 서울대 명예교수. 성악가 고(故) 오현명 선생은 그에게 ‘영원한 테너’라는 별명을 붙여 줬다. 그 별명처럼 아흔을 앞두고도 고음에 도전하는 테너로 활동 중이다. [사진 영음예술기획]

힘들지 않아서 계속하는 건 아니다. 89세 테너 안형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사실 요즘 노래 부르기가 참 힘들고, 그만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23일 오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제자 17명과 함께 무대에서 노래했다. 제자들과 매년 여는 콘서트인데 올해로 11년째다.

매년 무대 최고령 기록 경신 안형일 서울대 명예교수
전성기 ‘황금빛 트럼펫 고음’ 별명
음역도 바리톤으로 낮추지않아
매일 운동 … 90세 돼도 무대 서야지

 안 교수는 이렇게 매년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88세로 세웠던 최고령 테너 기록을 23일 깼다. 그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 성대가 탄력을 잃어버린다. 이제 옛날처럼 고음이 나진 않는다.” 헬스클럽에서 매일 운동을 하지만 무대에서 나이를 완전히 잊기는 쉽지 않다. 안 교수는 “테너에서 바리톤으로 음역을 낮춰 부르는 도밍고가 이해가 된다”고 했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안 교수보다 15세 아래다.

 젊은 시절 안 교수는 다부진 고음으로 유명했다. ‘황금빛 트럼펫 고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1950년대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이래 ‘카르멘’ ‘토스카’처럼 강렬한 소리가 필요한 작품에 주역으로 섰다. 지금껏 무대 출연은 2000회가 넘는다. 서울대 교수, 국립오페라단 단장도 지냈다. 그런 그가 “고음이 옛날 같지 않다”고 고백하면서 아흔을 앞두고도 일부러 무대를 마련해 노래하고 있다.

 게다가 여전히 테너다. 바리톤으로 음역대를 낮추지 않고 애써서 높은 음에 도전하고 있다는 뜻이다. 매년 여는 무대에서는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를 계속 부른다. “되는 데까지 계속 해보고 싶다”고 했다. 23일엔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중의 노래 ‘여자의 마음’을 불렀다. 극중 젊은 호색한이 부르는 노래를 아흔의 테너가 소화했다.

 쉽지 않은 무대에 매년 서는 이유는 뭘까. 그는 “나이가 많고 어렵다고 가만히 있으면 소리도 없어지고 노래도 더 안 된다”며 “60여 년 해온 일이고 갈고 닦은 실력인데 가만히 잃어버리기는 아깝다”고 했다. 또 “잘 아는 노래도 요즘 새로 공부하고 연구하는데 공부한 결과를 매년 무대에서 보여줄 필요성도 느꼈다”고 덧붙였다.

 ‘무대 경험’이라는 표현도 썼다. 무대에 수천 번 섰지만 공연 경험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뜻이다. “성악가는 틈만 나면 무대에 서야 된다. 연습실에서 노래를 잘 부르다가도 무대에 서면 잘 안 된다. 그러면서 배운다. 나는 요즘도 한 번 공연하고 나면 노래의 맛을 더 잘 알 것 같다.” 그는 “고음 같은 테크닉이 문제가 아니다. 인생 경험을 무던히 쌓고 나니 음악에서 느끼는 게 옛날보다 많다”고 했다.

 안 교수는 내년 가을에도 제자들과 무대에 설 계획이다. “90세를 채우고 은퇴 공연을 할까 생각 중인데 공연하고 나면 또 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또 “실제로는 26년생이지만 호적상으로는 27년생이다. 호적에 맞춰서 후년에 은퇴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90세를 훌쩍 넘긴 테너의 무대를 계속해서 만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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