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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 다 죽여야 하는데 … ” 김일곤 바지 속엔 28명 리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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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17일 오전 10시50분쯤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도로변. 흉기를 휘두르며 경찰 체포에 저항하던 ‘트렁크 시신’ 살해 피의자 김일곤(48)의 주머니에서 노란색 종이 두 장이 떨어졌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메모지였다. 가로줄이 쳐진 가로 15㎝, 세로 20㎝의 이 메모지에는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씨체로 ○○○ 재판장, △△△ 형사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날 저녁 서울 성동경찰서 조사실에서 형사가 “메모지에 적힌 사람들은 누구냐”고 묻자 김일곤은 메모지를 가리키며 “이것들 다 죽여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메모지는 김일곤의 ‘살생부’였다. 의사와 판사·형사 등 18명은 이름과 직업이, 10명은 직업만 적혀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물리치료사 등 의료계 종사자가 10명으로 가장 많았다. 김은 “내게 불친절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의사가 아픈 나를 강제로 퇴원시켰다.” “간호사는 나를 불친절하게 치료했다.” “형사는 1992년 폭행사건으로 나를 체포했고 재판장은 내게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메모지에는 그가 “피해자 A씨(35·여)를 살해할 때 떠올린 사람”이라고 지목한 식당 여주인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식자재 배달업을 하던 김일곤은 당시 식당 주인에게서 받기로 한 대금을 받지 못한 적이 있다고 했다.

경찰은 “그때 일을 계기로 김일곤이 ‘여성혐오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며 “그는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를 증오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김은 처음엔 피해자 A씨의 휴대전화와 차량을 빼앗기 위해 접근했다가 A씨가 달아나려 하자 욱하는 마음에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또 살해 후에는 “차 안에 내 유전자가 남아 있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차량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김일곤의 메모와 관련해 “추가 범행 정황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이 메모에 적힌 사람들을 직접 만난 사실이 없으며 복수를 준비한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범행 이후 지난 17일 검거되기까지의 행적은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않아 진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경찰은 18일 김일곤에 대해 강도살인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은 유치장 안에서 경찰관에게 “내가 경찰에게 메모를 빼앗겼는데 그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고 있을 것”이라며 “뉴스를 보고 싶으니 TV를 켜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경찰청은 김을 검거한 김성규(57) 경위와 주재진(40) 경사를 각각 1계급 특진시키고 김의 흉기를 뺏는 등 도움을 준 방모(50)씨 등 시민 2명에게는 ‘용감한 시민장’과 보상금을 수여했다.

김민관 기자 kim.minkwan@joongang.co.kr

납품대금 안 준 식당 주인 등 적혀
“내 뉴스 보게 TV 틀어달라” 요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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