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재현의 시시각각

면죄부에 눈감는 사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박재현
박재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박재현
논설위원

사건에 대한 가정(假定)을 한번 해보자.

 유명한 수학자가 학생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많은 동료 교수와 제자들이 탄원서를 내고 선처를 호소한다. 급기야 “학생들의 수학 실력 향상을 위해 교수를 석방해달라”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 학생들에 대한 국제기관의 수학 수준 평가서와 사교육에 따른 학부모들의 경제적 고통 수치까지 등장한다.

 아마도 “가당치 않은 뚱딴지같은 소리”라는 힐난이 뒤따를 것이다. “수학자가 나오면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올라갈 것처럼 말하다니. 형편없는 궤변이네….”

 하지만 그가 재력가라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호화 군단의 유명 로펌과 계약을 맺고, 평소 친분이 있는 관료와 정치인들을 통해 한국 학생들의 저조한 수학 실력 향상을 위한 대책을 호소한다면…. 칭병(稱病)을 통한 재판 지연도 또 다른 전략일 것이다. ‘사법정의가 미뤄지고 있다’는 등의 비판 여론쯤은 버틸 수 있는 맷집도 있어야 한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하지 않았나. 요즘 각종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백 주부의 인기 대사처럼 그럴싸하지 않나.

 지금도 검찰은 ‘있는 자’와 ‘가진 자’들을 상대로 수사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 지시에 따라 수사 강도는 좀 더 세질 것이다. 법원에서도 재벌과 권력자들에 대한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동정여론이 퍼지면서 그들은 슬그머니 자기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사회에 기여한 공로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정치적 고려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법심사의 영역이라고 돈의 논리를 버틸 재간이 있겠어”라는 악마적 속삭임이 들리지 않나. 이들의 입장에서 수억원에서 100억원대 이상의 법정 비용은 또 벌면 그만이다. 중세시대 교회가 면죄부(免罪符)를 팔아 치부를 했던 역사를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문제는 이 같은 사법적 불공정성에 대해 분노하는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지고 있는 데 있다. 범죄의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하는 사람이 있고, 정반대의 특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분법적 의식이 우리들에게 잠재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닐까. “법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정의는 세상을 덜 살아본 사람의 치기 어린 관념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될 때도 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맷 타이비의 분석. 그는 『가난은 어떻게 죄가 되는가』(원제 The divide American injustice in the age of the wealth gap)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에서 “미국인들은 법적 권리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복지 담당 조사관이 수급자들의 재정 상태를 조사하면서 경멸 어린 눈길로 멸시를 하고, 법원과 검찰도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가혹할 만큼의 처벌을 해왔다는 것이다. “미국인들 마음속에는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겐 증오심이, 부자에겐 두려움과 비굴함의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심리적 뒤틀림’이 한국이라고 다르겠나. 아마도 혹자는 “우리가 제일 심하다”고 소리치고 싶을 것이다.

 돈 없고 배경 없는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것이고, 돈 많은 사람은 일탈이나 위법행위를 한 것으로 법적 해석을 한 것은 갑(甲)에게 굽신거렸던 우리들 자신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임은 공정해야 재미가 있다. 그러려면 정부와 사법부가 입맛대로 불어대는 휘슬에 가끔은 머리를 들이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잇따른 면죄부 발급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눈감는 것만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쓰고 ‘호구’로 읽혀선 안 될 일이다. 공정하지 않은 법치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엔 올바른 법 적용 자체가 불법인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한명숙 전 의원이 구속 수감되면서 “정치적 탄압”을 주장한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라는 원망이 없지 않겠나.

 “미국적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는 번역자 후기에 ‘시민으로서의 용기’를 더해 본다. 

박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