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상하이 임정과 김구 선생 탈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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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4일 박근혜 대통령은 ‘항일독립의 심장부’이며 ‘대한민국의 법통이 시작된 곳’이라는 상하이 임시정부(임정) 청사 재개관식에 참석하여 테이프 커팅을 하였다.
상하이는 아편 전쟁이후 개방된 항구 도시이며 교통의 중심이고 자유 무역항으로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몰려와 거주하는 국제도시였다. 이곳에 일본에 의해 강점된 조국의 앞날을 걱정한 대한의 젊은 애국자들이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상하이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친목단체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당시 오스만 제국 해체 후 그리스로부터 터키를 지켜 낸 청년 장교 케말 파샤의 ‘터키청년당’의 활동을 참고하여 ‘신한청년당’으로 이름을 짓는다. 1918년도였다. 이들은 국내와 달리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민감하였다. 마침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하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워 과거 제국주의의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2월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몰래 보냈다. 그리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는 정보를 입수하여 영어가 능통한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한다. 그리고 도쿄의 유학생들에게는 식민지가 독립할 수 있는 세계 조류를 알려준다. 이에 따라 1919년 2월8일 도쿄에서 독립 선언서가 나왔다.
파리 출발 직전에 김규식은 세계 여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독립운동이 필요함을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주문하였다. 김규식의 부인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내로 잠입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마침 국내에서도 고종의 인산일에 맞추어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 출신을 포함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이 3월1일 독립 선언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3.1 독립운동 후 이를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그 해 4월 13일 상하이에 신한청년당원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설립된다. 망명정부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의 항일 독립운동 주도가 목적이다. 9월11일에는 각지에서 설립된 임시정부를 흡수 통합하여 본격적인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된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변한다. 처음에는 대통령제를 하다가 내각책임제와 집단지도 체제로, 그리고 주석제로 바뀐다. 그리고 임정 청사도 일제의 중국 침략에 따라 상하이-항저우-자싱-난징-창사-광저우-중칭 등으로 이전한다. 그 중에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은 상하이이다. 1919년부터 1932년까지 23년간 상하이에 있다 보니 상하이가 임정의 대명사가 되었다.
상하이 임정을 이끌던 김구 선생이 구사일생으로 상하이 위기를 탈출한 후 상하이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 박 대통령이 참석한 임정 청사는 김구 선생이 탈출한 후 사용되지 않았던 구 임정 청사를 수리하여 재개관 한 것이다.
1930년대 들어 와서 임정은 쇠퇴일로에 있었다. 승승장구하는 일제로부터 독립이 요원해 보여서인지 국내외 지원도 끊어졌다. 김구 선생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인애국단원’을 모집하여 일본의 요인을 암살하는 충격 요법이다. 일본어가 능통한 이봉창과 윤봉길을 한인애국단원으로 가입시켰다.
한인애국단원의 1차 거사는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어났다. 이봉창 의사가 일왕의 궁성 근처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실패였다. 2차 거사는 3개월 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행사에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이 성공하였다.
도쿄 사건에 잔뜩 긴장되어 있던 일본은 상하이에서 다시 허를 찔려 패닉 상태에 빠졌다. 윤봉길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지만 암살의 배후로 김구 선생이 지목되었다. 일제는 김구 선생에게 60만 위안(지금의 200억 원 정도)이라는 천문학적 현상금을 걸었다.
임정 요원은 상하이를 떠나야 했다. 일부는 항저우(杭州)로 가고 일부는 자싱(嘉興)으로 흩어졌다. 김구 선생은 신변을 안전을 위해 상하이의 YMCA 간사로 있는 미국인 피치(George A. Fitch) 목사의 집에 숨어들었다. 피치 목사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로 수저우(蘇州)에서 태어났다. 그는 임정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여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동차에 태워 홍커우(虹口) 행사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피치 목사의 집은 안심할 수는 없었지만 피치 목사가 미국인이라 일본이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3주가 지나자 피치 목사의 집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중국인 추푸청(楮輔成)의 도움을 청했다. 추푸청은 중국 신해혁명의 원로로서 항일구원회 회장으로 있었다. 추푸청은 자신의 아들 추펑장(楮鳳章)이 있는 자싱으로 피신할 것을 종용했다. 추펑장은 자싱에는 수륜사창이라는 면사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은 자싱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피치 목사의 집을 빠져 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피치 목사 집 주위에는 거액의 현상금을 노린 일본의 밀정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피치 목사는 꾀를 냈다. 김구 선생을 자신의 부인과 부부처럼 위장 시키고 자신은 운전기사로 분장하여 부부가 외출하는 것처럼 하여 집을 빠져 나가는 계획이다.
피치 목사는 김구 선생에게 흰 얼굴로 분장시키고 서양인 옷을 입혔다. 그리고 자신의 부인을 김구 선생과 함께 뒷자리에 동석시켜 부부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운전기사 복장을 하고 운전대를 잡고 집을 빠져 나왔다. 집 밖의 밀정들이 눈치 채지 못했다. 김구 선생은 자싱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추푸청은 자싱에 도착한 김구 선생을 메이완지에(梅灣街)에 있는 자신의 비서 겸 양아들인 첸둥성(陳棟生) 집의 한쪽을 쓰도록 하였다.
자싱은 운하와 호수의 도시이다. 보통 도시에는 마차나 자동차가 필요하듯 이곳은 배가 없으면 다닐 수가 없다. 첸둥성은 김구 선생을 위해 주아이빠오(朱愛寶)라는 20대의 처녀 뱃사공이 딸린 소형배(장크선)를 준비했다. 당시 자싱의 소형 배의 사공은 모두 촨낭(船娘)이라고 부르는 처녀들이었다. 물정 모르는 처녀 뱃사공은 김구 선생이 광둥 출신의 중국인으로 알고 헌신적으로 모셨다.
몇 해 전에 자싱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고속철로 상하이 홍차오 역에서 25분 달리면 자싱 남역에 닿는다. 김구 선생이 도피 생활을 했다는 메이완지에의 첸둥성 집에 가보았다. 남호가 내려다보이는 별관 2층 방이 김구 선생이 기거하던 방이다. 방 한쪽에 계단과 별도로 비밀통로도 만들어져 있었다. 김구 선생의 방은 첸둥성 내외가 기거하는 침실과 마주 보여 유사시 즉각 연락이 되도록 되어 있었다. 호수 가에는 도피용 배가 옛날처럼 매어져 있었다.(졸저 '삼국지문화' pp 53-61 참조)
김구 선생은 추푸청 일가의 도움으로 며느리 친정집 자이칭(載靑)별장 등 주거지를 옮겨 가면서 일제의 추격을 피했다. 상하이 임정 청사 재개관식에 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추푸청의 후손들이 참석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김구 선생은 자신의 일기(백범일지)에서 ‘오늘은 남문 밖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밖 호수로’라고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자싱에서 선상표박 생활도 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김구 선생은 부인 최준례를 사별한 홀몸이고 뱃사공이 20대 처녀라는 남녀 관계 설정으로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을 소재로 하는 소설이 나와 한 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가가 중국인인 ’촨웨(船月)‘라는 소설이다.
1935년부터 임정은 당시 수도 난징으로 옮기면서 항저우와 자싱으로 나누어져 있던 임정이 합치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난징도 일본에 의해 강점되어 임정은 장제스 총통의 배려로 임시 수도 충칭으로 옮긴다. 그리고 5년 후 그 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거금의 현상금이 걸려있는 데도 불구하고 추푸청 일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히 귀국한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 동족인 안두희에게 암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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