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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0만원짜리 ‘황제 이민’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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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011년 10월부터 필리핀 카비테주 아마데오로에서 살고 있는 한상숙(67·여)씨. 그는 ‘재수’ 끝에 필리핀 정착에 성공했다. 2006년 37년 만에 교직에서 은퇴한 한씨 부부는 따뜻한 나라에서 살고 싶었다. 2007년 한 국내 업체의 은퇴이민 설명회에 갔다가 꿈 같은 이민 생활에 혹했다. 4개월여 만인 2008년 3월 남편과 함께 짐을 싸 필리핀 라구나주로 훌쩍 떠났다. 그러나 막상 부부가 맞닥뜨린 현지 생활은 기대와는 딴판이었다. 현지 공무원의 게으른 행정 처리 때문에 운전면허를 따는 데만 4개월 넘게 걸렸다. 100만원이 넘는 월세도 부담이었다. 생활이 고립되자 고국에 대한 그리움만 밀려왔다. 결국 2년 만에 필리핀 생활을 접고 2010년 3월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한씨는 “첫 이민 땐 호기심과 기대에 부풀어 준비 없이 떠나 고생을 했다”며 “1년 반 동안 생활조건이 좋은 지역을 물색하고 30년 장기임대주택을 계약하는 등 치밀한 준비 끝에 필리핀 정착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정리한 뒤 지난해 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고급 주택단지로 이주한 김모(62)씨. 그는 취미인 골프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은퇴이민을 원했다. 처음엔 미국이나 캐나다를 마음에 뒀다. 그런데 손자를 조기 유학 보내려는 아들 부부의 권유로 말레이시아를 선택했다. 정식 은퇴비자를 받아 생활이 안정된 데다 인건비도 싸고 기후도 따뜻했다. 매달 아들 부부로부터 생활비도 받고 있다. 김씨는 “나이 들어 낯선 외국에 부부만 가서 정착하는 건 쉽지 않다”며 “잠깐 관광하다 갈 게 아니라 10년 이상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장기 플랜을 짜야 한다”고 조언했다.

 퇴직 후에도 20~30년 먹고살아야 하는 숙제를 안은 ‘반퇴세대’에겐 해외 이주가 새로운 선택지다.

그동안 모아 둔 재산과 연금으로 생활하자면 국내보다는 물가가 싼 해외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가까운 동남아시아·태평양 국가로 은퇴이민을 떠나는 사람이 빠르게 늘고 있는 건 이런 세태를 반영한다.

외교부에 따르면 2015년 한국을 떠나 남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주한 재외동포 수는 51만여 명이다. 2013년에 비해 약 2만4200명이 늘었다. 미국(14만7557명)에 이어 둘째로 증가율이 높다. 이민컨설팅업체 대양의 차재웅 대표는 “미국 이민자는 취업을 위해 떠나는 젊은 층이 다수”라며 “동남아시아·남태평양 지역은 퇴직 이후를 보내려는 50대 이상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최근엔 말레이시아 등 이곳 개발도상국도 외화를 유치하기 위해 한국 은퇴자를 겨냥한 비자 프로그램을 내놓는 등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필리핀 은퇴청의 은퇴비자(SRRV)를 받은 한국인 이민자 수는 2009년 270명에서 지난해 963명으로 3.6배가 됐다. 그러나 화려한 은퇴이민을 상상하고 무작정 떠났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이사는 “일본에서도 20여 년 전 동남아 은퇴이민 열풍이 불었지만 곧 거품이 꺼졌다”며 “흔히 말하는 ‘월 200만원에 황제처럼 지낼 수 있다’는 환상에 섣불리 이민을 떠나는 건 절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동호 선임기자, 염지현·이승호 기자, 김미진 인턴기자 hope.bantoi@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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