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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불리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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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너, 외동이지?’ 대학 친구 A는 이 말을 제일 싫어했다. 사연은 이랬다. 사람들은 A가 어릴 때부터 뭔가를 잘못하면 어김없이 ‘외동딸’로 불렀다.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도, 자기밖에 모르는 것도, 힘든 일을 못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A는 그 사람들에겐 확실한 의도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내가 틀렸다고 얘기하고 싶은 사람들의 일종의 기 죽이기”라고 했다. 나는 그런 A를 보며 ‘확실히 외동이라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내게도 걸리는 이름은 있었다. 취준생. 대학 졸업을 전후로 가장 무거운 이름이었다. 수업이 없는 오후, 캠퍼스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 떨던 어느 가을날을 기억한다. 캠퍼스 잡지 기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혹시 취준생이세요?” 그 말은 취업을 준비하는데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있느냐고,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도서관이 아니냐고 묻는 걸로 들렸다. 숙연해진 우리는 이내 자리를 피했다. 그 기자는 우리를 보며 ‘확실히 취준생이라 까칠하다’고 여겼을 거다.

 그 이후로도 88만원 세대, 3(연애·결혼·출산)포 세대라는 말의 공격에 나는 확실히 작아졌다. 그때마다 A를 떠올렸다. 겪어보니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유(類)의 이름은 최소한 직업이 있으며 한 달에 200만원 이상을 버는 중년들이, 연애라도 해본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말이었다. 불리고 싶은 이름을 물어본 사람은 없었다.

 요즘 내 귀를 불편하게 하는 말은 경력단절여성(경단녀)이다. 결혼 후 아직 자녀가 없는 직장 여성이니 나는 잠재적 경단녀다. 누구 말인가 찾아보니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촉진법’이 만들어지면서 퍼진 용어다. 아무리 도와주겠다는 취지가 좋다고 해도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 작명 센스다. 만들 땐 언제고 부총리가 “경단녀 용어를 없애겠다”고 선언하는 걸 보면 애초부터 정치적 필요로 만들어진 말이 아닌가 씁쓸하기도 하다.

 JTBC ‘비정상회담’의 다니엘은 얼마 전 칼럼을 통해 ‘나미살녀(나라의 미래를 살린 여성)’라는 말을 제안했다. 이 단어가 벌써 주부 커뮤니티에 스며들고 있는 걸 보면 나만 경단녀란 말이 싫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주부경력여성, 새일맘(새로 일을 기다리는 엄마) 등의 아이디어도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이름들을 아예 없애는 게 어떨까 한다. 중국 친구에게 물었더니 따로 이런 여성들을 부르는 말은 없단다. 굳이 찾자면 전 직업여성, 가정주부 정도 된다고. ‘~녀’가 워낙 많은 사회니 기 죽이는 여러 가지 이름들은 좀 줄여도 좋겠다.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불필요한 이름이 없었다면 대학 4학년 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저 대학생, 또는 아줌마로 좀 더 어깨를 펴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