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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분간 잠만 자는 연극, 무용수 없는 무용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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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대만 영화감독 차이밍량이 연출한 연극 ‘당나라 승려’ 공연 장면. 승려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50여 분 동안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관객은 이들의 움직임을 묵묵히 지켜본다.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문화전당)이 문을 연 지난 4일, 문화전당 예술극장 안에서 가장 큰 극장인 ‘극장1’ 무대를 처음 밟은 작품은 대만 영화감독 차이밍량(58)의 연극 ‘당나라 승려’였다.

 공연은 독특했다. 널찍한 극장 바닥 가운데 비스듬히 놓인 가로 8m, 세로 4.6m 크기의 흰 종이 위에 당나라 승려 현장법사 역을 맡은 배우 이강생이 자고 있었다. 잠시 후 화가 카오쥔홍이 등장해 잠든 현장법사 주변 빈 종이 위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려넣었다. 250여 명의 관객들은 묵묵히 50여 분 동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공연 2시간 동안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세상은 천천히 움직였다. 점점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현대적 삶에 대한 저항이 강렬하게 전해졌다.

 무대도, 객석도 독특했다. ‘극장1’의 한쪽 벽면은 마치 비행기 격납고처럼 개방 가능하도록 지어졌다. 오후 7시 공연이 시작되자 한쪽 벽 문이 서서히 열렸다. 붉은 햇살이 까만 어둠에 묻히는 과정까지 공연의 일부가 됐다. 열린 벽을 마주보고 놓인 객석은 좌식이었다. “고통을 견뎌야 하는 객석을 만들고 싶었다”는 연출가 차이밍량의 의도에 따라 관객들은 다리를 뻗지 못한 채 2시간을 버텨야 했다. 하지만 반드시 참지 않아도 괜찮았다. 공연 도중 일어서는 것, 자리를 옮기는 것, 심지어 극장 밖으로 나가는 것 등이 모두 허용됐다.

 ‘당나라 승려’는 문화전당 예술극장이 20일까지 진행하는 개관 페스티벌 공연 작품 33편 중 하나다. “‘오늘’을 이야기하는 가장 진취적인 작품의 기획·제작·순환의 허브가 되겠다”는 예술극장 목표에 맞춰 실험성 강한 작품들이 상당수 눈에 띄었다. 5일부터 공연한 이탈리아 연출가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봄의 제전’도 흥미로웠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춰 소 75마리의 뼛가루를 천장에 달린 기계를 통해 뿜어내는 게 공연 내용의 전부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소 뼛가루의 움직임이 ‘무용수 없는 무용’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새롭고 도전적인 작품이 여럿 마련됐지만 일반 관객이 쉽게 접근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개관 첫 날 예술극장 안에서 공연 관계자 이외의 ‘일반인’ 관객을 찾기 어려웠다. 홍보·마케팅 등 공연 앞뒤 요소가 모두 ‘전문가 스타일’로 진행된 탓이다. 일례로 개관 페스티벌 프로그램 소개 책자에 나와있는 ‘봄의 제전’ 설명은 이렇다.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재해석하는 ‘봄의 제전’은 죽음과 현존의 기이한 경계를 물화시킨다. (…) 무대는 현전하는 비언어와 언어적인 현전을 서로 환원시키는 연금술의 장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지. 현학적인 단어 나열에 익숙한 전문가들의 ‘그들만의 잔치’가 되지 않으려면 일반 관객 눈높이에 맞춘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착공 10년 만에 문을 연 문화전당의 당면 과제다.

광주광역시=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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