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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잠자는 퇴직연금을 흔들어 깨워라

중앙일보

입력

서명수

잠자는 퇴직연금을 흔들어 깨워라

국내 유통 업체인 A사는 얼마 전 내년부터 퇴직연금을 종업원들이 스스로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으로 바꾸기로 했다. 퇴직연금 운용 규모가 600억원이 넘는 가운데 저금리 지속으로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들어서다. 그러나 노조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관건이다. 지난 2000년 퇴직연금제도 도입 때 DC형으로 하려다가 노조의 반발로 할 수 없이 확정급여형(DB)으로 갔다. 이 회사 관계자는 “당시엔 금리가 높아 별 문제가 없었으나 이젠 저금리로 퇴직연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는 회사 사정을 노조도 잘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이 퇴직연금제도 운용과 관련해 회사가 책임지는 DB형에서 발을 빼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저금리 장기화로 DB형 운용에서 손익 역전 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DB형은 운용수익률이 임금인상률에 미치지 못하면 회사가 그 갭을 메워야 한다. 물론 운용수익률이 임금상승률보다 높아 이익이 생기면 회사의 몫이다.

저금리로 퇴직연금 운용에 손익 역전 현상

현행 퇴직연금제도는 기존의 퇴직금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2005년 12월 처음 도입된 것으로 대기업부터 시행해 왔다. 퇴직연금제도의 가장 큰 목적은 회사가 망하거나 할 때 종업원들이 지급받지 못할 수 있는 퇴직금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또 퇴직금이 급한 생활비로 쓰이지 않고 퇴직 후 연금으로 활용되도록 한다는 취지도 있었다. 이에 따라 퇴직연금은 사내가 아닌 사외 적립하도록 의무화됐다. 이와 함께 운용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DB형과 DC형으로 나눴다. 퇴직연금제도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회사는 DB형을 택했다. 노조가 DC형은 회사의 복지부담을 종업원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라며 반발하는데다, 회사도 DB형으로도 운용수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는 종업원 호주머니로 들어갈 퇴직 급여를 위험 부담을 안으며 적극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주식·펀드 등 투자상품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지난 3월 말 현재 가입금액 75조5000억원으로 우리나라 퇴직연금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DB형은 전체 자산의 98%를 원금보장형으로 가입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원금보장형은 은행예금이나 채권처럼 원금이 깨질 리 없는 ‘안전빵’ 상품에 굴린다. 이 때문인지 퇴직연금 가입자인 근로자들 대부분은 자신의 퇴직연금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신의 퇴직연금이 DC형에 들어 있는지, DB형에 들어가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근로자가 많다. DC형을 선택한 근로자의 95% 이상도 원금보장 상품에 가입하고 있다.

문제는 원금보장 DB형 퇴직연금의 금리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금보장 DB형 퇴직연금 금리는 2012년 4.39%에서 2013년 3.48%, 2014년 2.71% 낮아졌다. 은행금리가 1%대로 떨어진 올들어선 퇴직연금 금리 하락세가 한층 가팔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금인상률을 3%만 잡아도 회사 입장에서 퇴직연금은 밑지는 장사다. 만약 A사가 DB형으로 그냥 갔을 경우 10년 뒤에는 손실 충당금을 적립해야 하는 금액이 매년 수십 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금리가 더 떨어지고 퇴직연금 규모가 커질 경우 퇴직연금의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크다. 퇴직연금의 부실 문제로 경영난에 허덕이다 도산한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의 GM과 델타항공 등은 금융위기 때 퇴직연금 부실이 경영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문을 닫을 뻔한 적이 있다. 전문가들은 저금리 시대에 DB형을 고집하는 것은 제 발등 찍기나 다름 없다며 빨리 DC형 전환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게 기업의 재정건정성을 도와주면서 개인에게는 연금수급권을 강화해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DC형 전환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내년부터 정년 연장에 따라 도입될 임금피크제다. 임금피크제 아래에선 DB형 가입자는 무조건 손해를 보게 돼 있다. 가령 DB형 가입자가 현재 55세로 이달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고 치자. 퇴직 직전 평균임금은 월 500만 원이고 재직기간은 20년이다. 이 경우 퇴직급여로 1억 원(500만 원×20년)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이 가입자의 회사가 정년을 60세로 5년 연장하면서 늘어난 근무기간 동안 매년 전년 대비 임금을 10%씩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이렇게 매년 임금이 10%씩 줄어들면 60세가 됐을 때 평균임금은 월 295만 원이 되고 재직기간은 25년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그가 받는 퇴직연금은 7381만 원(295만 원×25년)이 된다. 5년 더 일했는데도 퇴직금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만약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당시 퇴직연금을 DB형에서 DC형로 갈아탔다고 가정하고 60세 때 퇴직급여를 계산해보자. 우선 55세 때 이미 발생한 퇴직급여 1억 원이 DB에서 DC계좌로 이체된다. 그리고 56세부터 60세까지 임금이 줄어드는 동안에도 매년 한 달치 임금에 해당하는 퇴직급여가 DC계좌로 이체된다. 그러면 5년 동안 DC 계좌에서 아무런 수익이 나지 않는다 해도 60세 때 받게 될 퇴직급여는 1억2549만 원이 된다. 만약 DC계좌에서 5년 동안 연평균 3% 정도의 수익을 내면 1억4141만 원을 받을 수 있다.

DC형 전환은 투자실력 발휘할 기회

하지만 DC형 전환이 이루어진다 해도 지금처럼 원금보장형을 선호하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원금보장형은 보유 자산을 잠재우는 거나 마찬가지다. DC형의 수익률이 DB형과 비슷한 2.7%인 데, 이는 대부분이 원금보장형이기 때문이다. 저금리 시대엔 주식·펀드 등 실적배당 상품이 아니고서는 절대 은퇴자산을 불릴 수 없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개인연금과 함께 3층 노후 설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들 연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은 가입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운용되는데 반해 퇴직연금은 본인이 자유롭게 굴릴 수 있다. 게다가 지난 7월 정부는 DC형의 주식이나 펀드 투자한도를 종전 40%에서 70%로 상향조정해 주었다. DC형에 생기발랄한 바람을 불어넣어 퇴직연금 시장을 활성화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기회다. 투자와 관련한 공부를 열심히 해 실력을 쌓아 DC계좌의 수익률을 끌어올린다면 노후생활의 질을 얼마든지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DC형이 연금시장의 대세가 될 가능성이 큰 만큼 개인들은 싫으나 좋으나 주식·펀드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우리나라도 401K를 도입해 퇴직연금 제도를 정착시킨 미국 처럼 ‘주식 수요 확대→주가 상승→부의 증가’라는 선순환사이클이 이뤄지면서 백만장자 월급쟁이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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