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촌|전남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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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수양대군이 어린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57년, 성삼문·박팽년등은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료인 김석의 배신으로 탄로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소식을 들은 박팽년의 매부 봉여해는 세조를 살해하기위해 칼을 차고 어전으로 가던도중 의금부에 붙잡혀 화를 당했다.
당시 그의 벼슬은 궁중요리를 검사하는사옹원별좌였기에 어전출입이 쉬웠다한다.
봉여해가 참변을 당하자 그의아들 봉인(사헌부감찰)과두동생 봉극순(태인현감), 봉극겸(대호군)등은 버슬에서 물러나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보생리로 피신했다.
이때부터 그의 후손들은 보생리에서 5백78년동안 혈맥을 이어왔다.
마을전체 60여호 3백여명이 한피붙이요 다정한 이웃이다.
마을중앙에 지붕을 드리운 「만곡사」는 봉문(고려·판도판서), 봉유례(고려·전리판서), 봉즙(세종·병조판서), 봉여해. 박팽년, 봉단의(주박·임진왜란공신)등 6현의 위패를 모신사당. 음력3월10일이면 호남의 유림들과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선조가 정변에 휘말려 화를 당하자 후손들은 정치나 벼슬과는 인연을 끊고 살았다.
조선5백년동안 진사 2명을 배출했을뿐 관직에 오른인물은 없다.
호남의 반촌으로서 유가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탓인지 마을의 발전도 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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