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정부부터 ‘퍼스트 무버’가 돼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김상선
김상선 기자 중앙일보 부장
경기도 의왕시의 현대차 중앙연구소에서 연구원이 자율주행 ‘R카’를 테스트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김준술
경제부문 기자

본지가 6회에 걸쳐 다룬 ‘100년 갈 성장엔진을 키우자’ 보도가 나간 뒤 이현재 새누리당 의원이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산업통상자원부 간부 출신의 ‘산업 전문가’다. 이 의원은 “한국이 연구개발(R&D) 예산을 많이 쓰지만 기술 심사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정부의 뒤떨어진 정책을 기사로 지적해 달라”고 당부했다.

 ‘철강업 돌파구는 고급화에 있다’는 기사가 실린 직후엔 A철강사가 “업계의 미래 과제를 제시한 컨설팅 전문가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석유화학 업체들은 “우리도 세계시장을 공략할 신기술이 있다”며 정보를 보내왔다.

 대한민국의 ‘주력 제조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기사에 소개된 철강·자동차·전자·건설 등은 광복 이후 70년간 헐벗은 빈곤국을 이만큼 키운 주역인 까닭이다.

 하지만 뜨거운 반응의 이면엔 위기감도 짙게 배어 있다. 현대차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연구소가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3D 프린터를 500대 보유했다는 기사 내용은 우리에게 아주 민감한 부분”이라며 자료를 요청한 것은 이런 위기감의 표현이다. 선진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조업 르네상스’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술의 독일’은 2012년부터 ‘인더스트리 4.0’을 국가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자동화·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인공지능형 공장’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프로젝트다. 136년 전 전구로 혁명을 일으킨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도 ‘스마트 공장’을 무기로 꺼내들었다. GE 임원은 “공장 곳곳에 ‘정밀 센서’를 장착한 뒤 여기서 나오는 빅데이터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IT·제조업을 묶는 ‘하이브리드 산업’은 이제 증기기관·대량생산·자동화에 이어 ‘네 번째 산업혁명’으로 불린다.

 이런 경쟁에서 낙오하면 다시 선진국 ‘꽁무니’를 쫓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침 기획재정부도 ‘신(新)산업 성장 전략’(가칭)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흩어진 각 부처의 산업 정책을 하나로 묶고 기업들에 기술 개발의 멍석을 깔아준다는 그림이다.

 그렇다고 정부가 과거 ‘개발시대’처럼 모든 걸 틀어쥐고 간섭해선 안 된다. 미국·독일처럼 제도를 잘 손질하고 R&D 불씨를 지펴주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100년 성장 엔진’을 구축하기 위한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만년 추격자 신세로는 3만 달러 시대조차 꿈같은 일이다. ‘경제추격론’을 연구해 온 이근 서울대 경제연구소장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처럼 규제가 많은 곳에서 ‘퍼스트 무버’(선도자)가 되겠다고 나서면 ‘퍼스트 루저’(패배자)가 되기 십상이다. 정부부터 퍼스트 무버가 돼라.”

글=김준술 경제부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