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 … 남북 지도부 인식 작용한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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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호 4 면

22일 경기도 연천 일대에 배치된 다연장 로켓포 주위에서 한국군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김춘식 기자

마주 달리던 열차가 일단 속도를 늦췄다. 정부 당국자는 “남과 북의 남북관계 분야 최고 수장들이 22일 접촉하면서 일촉즉발의 군사적 충돌위기는 넘겼다”고 말했다. 김규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제1차장은 북한군 총참모부가 최후통첩으로 상정했던 오후 5시(평양시, 한국시간 오후 5시30분)를 2시간30분여 앞두고 ‘2+2회담’ 접촉 소식을 전했다. ‘최후통첩’ 48시간이 대화의 시간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남북 고위급 접촉은 ‘전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21일 오전부터 판문점 연락관을 통해 전화통지문을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북한은 전통문 수령을 거부했고 남북한 군은 군사분계선(MDL)을 사이에 두고 전력을 증강하는 등 긴장의 수위를 높였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21일 오후 8시 대국민 담화 ‘최근 북 도발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대북 확성기 방송은 지뢰도발에 따른 우리의 응당한 조치”라며 “만약 이를 구실로 추가 도발을 해온다면 우리 군은 이미 경고한 대로 가차 없이 단호하게 응징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방의 북한군 역시 이날 오후 5시를 기해 전시체제로 전환하며 방사포(다연장 로켓)와 장사정포를 사격진지로 옮기고 사격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측의 군사적 긴장 고조와 동시에 청와대-국방위 라인은 21일부터 긴박하게 움직였다. 북한은 홍 장관의 전통문을 거절한 대신 대남업무를 총괄하는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를 내세워 21일 오후 4시 전통문을 보내왔다. “21일 혹은 22일 판문점에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일대일 접촉을 갖자”는 제의였다.
청와대는 두 시간 만에 답신을 보냈다. 김 실장 명의로 북한군을 대표하는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만나자는 의견을 담았다. 정부 당국자는 “김관진 실장과 지난해 10월 만난 적이 있어 말이 통할 수 있고,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현안인 군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북한 군부의 대표성을 가진 인물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황병서 총정치국장과의 만남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북측은 하룻밤을 보낸 뒤 22일 오전 9시35분쯤 황 국장 명의의 전통문을 통해 자신과 김 비서가 나갈 테니 김 실장과 홍 장관이 나왔으면 한다는 수정 제의를 해왔고, 정부가 이를 수용했다. 북측도 이날 낮 12시45분에 만나자는 연락을 해오면서 김 비서의 첫 제안부터 양측이 다섯 차례 전통문을 주고받은 뒤 만남이 성사됐다. 20시간45분 만이었다. 김 실장과 황 국장의 만남은 지난해 10월 4일 인천에서 만난 뒤 10개월여 만이다.

군사적 충돌은 북한에도 부담
충돌 직전 양측이 회담 테이블에 극적으로 앉은 건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는 남과 북 지도부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이번을 기회로 북한 도발의 악순환 고리를 끊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전투를 벌일 경우 피해가 불가피한 데다 북한이 대화를 제의해온 이상 피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시로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하는 것”이라며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무엇보다 오는 25일로 박근혜 정부가 임기 반환점을 도는 점을 감안하면 남북관계 분위기 전환을 위한 극적 타결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는 게 정부 당국자의 설명이다.
내부 결속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낸 북한 역시 군사적 충돌이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자신들이 하지 않았다고 발뺌할 수 있을 정도의 저강도 도발 뒤 군사적 긴장을 통해 정전질서와 한반도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확인시켰다”며 “내부 결속도 달성한 만큼 한·미 연합훈련인 UFG(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 군사적 행동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초부터 군사적 충돌보다는 대화 재개를 염두에 둔 계산된 벼랑 끝 전술일 수 있다는 얘기다. 김양건 비서가 먼저 대화 제의를 하는 형식을 보인 것이나, 북한이 지난 20일 ‘48시간 통첩’ 이후 보여준 행보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은 20일 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중앙군사위원회 비상확대회의 소집 소식과 회의 결과를 곧바로 보도했다. ‘준전시(準戰時)상태를 선포하고 전방지역 부대들은 ‘불의 작전’을 준비토록 했다는 내용이었다. 또 천안함 폭침사건을 이끌었던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21일 평양 주재 외교관들과 외신들을 대상으로 “확성기 방송이나 삐라 살포는 노골적인 심리전으로 남측의 무모한 도발은 기필코 값비싼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외무성에선 “체제를 지키기 위해 전면전을 불사하겠다”고도 했다. 국제사회를 향해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친 셈이다. 김용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전 때처럼 북한이 실제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한다”며 “이처럼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언론활동을 한 건 ‘누가 좀 말려 달라’거나 ‘전쟁을 원치 않으면 대화를 제의하라’는 일종의 러브콜 성격의 행위”라고 말했다.

“북이 대화 나선 건 명분 쌓기일 수도”
미국·중국 등 국제사회가 자제를 요청해 ‘통 큰 결단을 내리게 됐다’는 명분도 쌓았고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잡았으니 일종의 퇴로 열기 차원의 제안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북한이 회담을 결렬시킨 뒤 공격을 위한 명분 쌓기용이라는 분석도 있다. 익명을 원한 국책연구기관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은 목함지뢰 도발(4일)이나 연천 포격(20일)은 자신들의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오히려 남측이 긴장을 고조시켰고 대화로 해결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공격한다는 명분 쌓기 차원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회담으로 인해 최고조에 이르렀던 긴장감은 다소 진정됐지만 군사적 대치는 지속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북한의 공격 움직임이 그대로이고 북한이 회담과 공격이라는 양면전술을 펼 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며 “회담과 관계없이 군의 대비태세는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은 지난 10일 시작한 전방지역의 대북 확성기 방송도 계획대로 진행했다. 북한군 역시 대피소에 해당하는 갱도에 머물며 각종 무기들에는 실탄을 장전하는 등 전시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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