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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의 영혼이 죽어간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베네치아의 관광명소 산마르코 광장이 2009년 12월 홍수로 물에 잠겼다. 지난 1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수위는 꾸준히 상승했고 많은 전문가가 앞으로 80년 안에 도시가 완전히 물에 잠길 것으로 내다본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어느 쌀쌀한 아침. 바람이 에메랄드 빛 운하를 가로지른다. 난 관광객으로 붐비는 곤돌라 정거장에 서 있다. 곤돌라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뱃사공 디에고 레돌피(49)를 만나기 위해서다. 때마침 베네치아 관광 성수기여서 레돌피는 쉴 시간이 거의 없다.

레돌피는 이 유명한 물의 도시에서 일하는 곤돌라 사공 400여 명 중 1명이다. 그는 매일 능숙한 솜씨로 노를 저어 다른 배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좁은 뱃길을 왔다갔다한다. 곤돌라 사공은 베네치아에서 보수가 높은 일자리 중 하나로 연간 최대 15만 달러를 번다. 하지만 그 봉급으로도 베네치아에선 웬만한 크기의 아파트를 세내기 어렵다. 그래서 레돌피와 그의 미국인 아내는 베네치아 근처의 다른 섬에서 산다.

베네치아의 물가가 이렇게 비싼 이유는 레돌피의 곤돌라를 타려고 길게 늘어선 관광객의 줄과 깊은 연관이 있다. 지난 15년 동안 베네치아 유람선 관광이 5배 증가했다. 이 거대한 유람선들은 이제 유럽 유람선 관광의 수도가 된 베네치아에 큰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형편없는 뷔페 음식에 유치한 오락거리가 가득한 이 물 위의 호텔들은 베네치아의 좁은 거리로 관광객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이것은 외부인이 쓰는 돈에 의존해 먹고 사는 이 도시에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유람선을 타고 베네치아에 들어오는 관광객이 그곳에서 쓰는 돈은 연간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관광업계 비평가들에 따르면 이 관광객은 레스토랑이나 상점에서 많은 시간(또는 돈)을 쓰지 않는다. 일부는 고가의 곤돌라 관광을 선택하지만 대다수가 유람선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베네치아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기 전에 그곳을 떠난다. 매년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 2000만 명 중 그곳에서 숙박하는 사람은 절반에 불과하다. 지난 25년 동안 베네치아의 호텔 숙박이 3분의 2나 감소한 이유다.

요즘 베네치아에서는 당일치기 관광객 수가 1박 관광객과 상주 인구보다 더 많다. 관광 이외의 일자리 감소와 식료품·대중교통·주택 가격 인상으로 베네치아 인구는 갈수록 줄어든다. 영화관 수도 20개에서 2개로 줄었고, 상점과 레스토랑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관광객에게 더 비싼 값을 받던 오랜 관행을 뒤집어 현지인에게도 ‘관광객 가격’을 적용한다.

지난 20년 동안 부동산 소유주들이 아파트를 호텔이나 에어비앤비(숙박공유 서비스) 임대숙소로 개조하는 바람에 영구주택 가격이 상승했다. 그 결과 부자가 아니면 베네치아에서 살 수 없게 됐다. 베네치아의 인구는 30년 전 12만 명에서 현재 5만5000명으로 줄었다. 일부 인구통계학자들은 2030년이 되면 상주인구가 아예 없어질 것으로 예측한다.

아드리아해의 디즈니랜드

해 뜰 무렵 산마르코 광장 근처의 해변 산책로.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 대다수가 다행히도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잔잔한 운하와 곡선형 다리, 자갈 깔린 보행자 전용 거리 덕분에 베네치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2008년 이 도시의 인구가 6만 명 이하로 줄어들자 주민들은 ‘장례식’을 거행했다. 붉은색 관과 3대의 곤돌라로 구성된 장례 행렬이 운하를 통과하면서 인구 감소의 심각성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하지만 이런 창조적인 시위도 인구 감소 추세를 뒤집지 못했다. 현재 이곳에 사는 주민이나 비싼 물가 때문에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 모두 이 도시의 영혼이 죽어간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마테오 세키와 그의 아버지 마리오는 태생으로나 마음으로나 진정한 베네치아인이지만 현재 주소지는 그곳이 아니다. 난 어느날 오후 두 사람을 만나 살루미(이탈리아식 가공육)와 치즈를 안주 삼아 레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마테오는 베네치아에 있는 한 호텔의 매니저이며 마리오는 현지 와인업체의 판매업자다. 현재 70세인 마리오는 퇴직할 수도 있지만 일은 그에게 베네치아에서 옛 친구들을 만날 기회를 준다. 그는 고향인 베네치아에서 살고 싶지만 비싼 집값과 물가 때문에 이탈리아 본토의 메스트레에서 80㎡짜리 아파트에 세들어 산다. “그 돈으로 베네치아에서 30㎡짜리 아파트만 얻을 수 있어도 당장 옮기겠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함께 와인을 마시는 동안 아버지와 아들은 평소에 자주 그러듯이 베네치아 관광산업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은 그들이 ‘이중적’이라고 말하는 문제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같다. 베네치아에서 오랫동안 살던 주민이 주택 소유주들과 당일치기 관광객에게 밀려 이 도시를 떠나고 있다는 게 바로 그 문제점이다. 주택 소유주는 주민에게 세를 놓기보다는 호화로운 휴가용 아파트를 찾는 부유한 외국인을 상대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또 당일치기 관광객은 정부가 현지인에게 알맞은 가격의 주택을 제공하는 데 필요한 세수를 확보할 만큼 충분한 돈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해결책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의견이 달랐다. 마리오는 베네치아 둘레에 관문을 설치해 관광객이 드나들 때마다 의무적으로 요금을 지불하도록 하자는 의견에 찬성한다. “관광객이 이 도시를 더럽히고 있으니 요금을 지불해야 마땅하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마테오는 그런 요금이 베네치아를 테마파크로 둔갑시킬 거라고 생각한다. “베네치아에 입구를 만들면 디즈니랜드처럼 되지 않겠나?”

베네치아는 실속 없는 당일치기 관광객의 범람으로 몸살을 앓기 오래 전 시법으로 부동산 임대료의 상한선을 정해 놓았었다. 1970년대 부동산 임대주들이 이 상한선의 폐지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한 후 임대료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솟았다. 베네치아 공항에서 유람선 터미널까지 수상 셔틀을 운행하는 알리아구나 스파의 파비오 사코 사장은 시 당국이 옛 궁전들을 아파트로 개조해 젊은 부부들과 가족에게 임대하기를 바란다. “베네치아에는 중간 수준의 임대료로 세들어 살 수 있는 주거 공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마테오도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이 개입해서 강압적인 수단을 써서라도 보통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임대료를 낮춰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현재 베네치아에는 시장도 시정부도 없다.

가라앉는 도시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이 하루 중 유일하게 조용할 때다. 20년 동안 곤돌라 사공으로 일해온 디에고 레돌피가 승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베네치아 주택 위기의 요인 중 하나는 이 도시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물이다. 20세기 초부터 아드리아해의 잦은 범람으로 수많은 건물의 저층부가 손상됐다. 이것은 또 아파트 수 감소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난 1세기 동안 베네치아의 평균 수위는 꾸준히 상승했고 많은 전문가가 앞으로 80년 안에 도시가 완전히 물에 잠길 것으로 내다본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아드리아해의 수위가 걱정스런 수준까지 상승할 때마다 베네치아를 바다로부터 분리시켜줄 수중수문 78개의 건설 계획에 착수했다. 2003년 시작돼 앞으로 1~2년 후에 마무리될 예정이던 이 프로젝트는 현재 부패 스캔들에 휩싸였다. 조르조 오르소니 전 시장과 35명의 공무원 및 도급업자들이 공금 수천만 유로를 횡령했다고 알려졌다.

혐의를 받은 관리들이 지난여름 일제히 사퇴하면서 베네치아는 공식적인 시정부가 없는 도시가 됐다. 오는 6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중앙 정부에서 임명한 특별담당관이 도시를 관할한다. 하지만 임시 지도자들은 베네치아의 주택 문제 해결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다.

“내 나이 또래의 주민들은 모두 이 문제를 이해한다”고 베네치아 주민 알레산드로 버뱅크(26)가 말했다. “하지만 50세 이상 나이가 든 사람들은 다르다. 난 그들을 인간으로서 사랑하지만 현재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게 문제다. 문제가 해결되려면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버뱅크와 나는 해질 무렵 캄포 산토 스테파노(베네치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에 있는 광장)의 한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면 어머니와 함께 탱고 레슨을 받으러 갈 거라고 했다. 20대 청년이 어머니와 함께 탱고 레슨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버뱅크와 그의 어머니는 그 밖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우선 그들은 같은 아파트에서 산다. 버뱅크(아버지가 미국인이다)가 베네치아에서 살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 맥주를 마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가가 비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베네치아에는 남자 혼자서 살 만한 곳이 없다.”

“평범한 삶이 존재하지 않는 곳”

버뱅크의 고교 동창생 대다수는 대학 진학을 위해 베네치아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시인인 그는 베네치아에 남아서 시간제 웨이터로 일해 생계를 유지한다. 여자친구는 베네치아에서 살 만큼 형편이 넉넉지 않아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세들어 산다.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버뱅크가 사랑하는 베네치아를 떠나야 하는데 그는 그러고 싶지 않다.

“10~20년 전 꿈꾸던 삶은 이제 끝났다”고 그는 말했다. “베네치아에서 집과 일자리를 갖고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이란 이제 더는 찾아보기 힘들다.”

곤돌라 정거장에서 레돌피는 다음 손님들을 태우기 전 잠깐 동안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곤돌라에 올라탄 내게 그는 20년 동안 곤돌라 사공으로 일해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레돌피는 곤돌라 사업이 과거 어느 때 못지 않게 잘된다고 말했다.

레돌피는 근처 호텔에서 리셉셔니스트로 일하다가 베네치아에서 살 만큼 보수가 넉넉지 않아 곤돌라 사업을 시작했다. 형의 조언에 따라 그는 곤돌라 1대를 사서 운하를 능숙하게 오르내릴 수 있을 때까지 하루 10~12시간씩 노 젓는 연습을 했다. “이 일은 섹스와 흡사하다”고 그는 말했다. “평생을 계속해도 마스터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럭저럭 해나갈 수는 있다.”

이제 레돌피는 베네치아에서 살 수 있을 만큼 형편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아주 작은 아파트밖에 빌릴 수 없다. 또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베네치아보다 관광객이 더 적다는 이점이 있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베네치아가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베네치아를 망쳐 놓지는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베네치아도 바깥 세상처럼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다른 어떤 곳보다 더 낫다.”

난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곤돌라에서 내렸다. 다음 관광객이 곤돌라에 올라타 벨벳 의자에 앉았다. 난 선창에 서서 레돌피가 노를 저어 승객들을 근처의 한 다리 밑으로 안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윈스턴 로스 뉴스위크 기자 / 번역 정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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