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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고려인마을에 러시아어 열공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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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어린이집에서 주민들이 고려인 강사에게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 러시아어 교실은 매주 월요일 열린다. [프리랜서 오종찬]

“아, 베, 붸, 게, 데….”(러시아어 강사)

 “아! 베! 붸! 게! 데!”(한국인 수강생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0일 오후 7시30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 어린이집.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강로자(28·여)씨가 화이트보드에 적힌 러시아어 알파벳 발음을 알려주자 10여 명 한국인 수강생들이 또박또박 따라했다. 그러다 강사가 생소한 발음을 냈다. 순간 멈칫하고 옆 사람 눈치를 보던 수강생들은 민망한 듯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대부분 어른인 수강생들은 취학 전 어린이들이 쓰는 야트막한 책상 앞 조그만 의자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다시피 앉아 있었다. 러시아어 강좌 공간을 따로 마련하지 못해 어린이집을 빌렸기에 연출된 풍경이다.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밀집 지역인 광주시 월곡동과 주변 마을 주민들이 러시아어 배우기에 나섰다. 어엿한 주민들로 자리잡은 고려인들과 이웃사촌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키르키즈스탄 등에서 온 고려인 3000여 명이 모여 사는 월곡동은 경기도 안산시 다음으로 고려인이 많이 사는 곳이다. 이들의 조상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와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 갔다. 2008년께부터 돈을 벌기 위해 조상의 땅을 찾아온 고려인들은 하나둘씩 광주시 하남공단과 평동공단 주변인 이곳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차츰 월곡동의 주요 구성원이 됐다. 하지만 한국인들과 교류는 거의 없었다. 생김새만 비슷했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말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칠 때 낯이 익은 듯 흘끔흘끔 쳐다보면서도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서로를 이어주는 물꼬는 고려인마을 인근 ‘늘푸른 작은도서관’ 이순옥(55·여) 관장과 자원봉사자들이 텄다. 2013년부터 고려인 자녀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한글 교육을 하던 중 문득 “이들만 한국어를 배울 게 아니라 한국인 주민들이 고려인 언어인 러시아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 관장은 “그전까지 우리들은 고려인을 잘 모르면서 그들에게 한글과 한국 문화만 강요해온 것 같았다”고 말했다.

 광산구청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올 6월 러시아어 강좌를 열었다. 매주 한 차례, 총 30회 일정으로 인사와 간단한 자기 소개 등을 배우는 과정이다. 초등학생부터 주부까지 평소 고려인과 러시아에 관심이 많은 10여 명이 찾아왔다. 수강생 이수현(18·장덕고 2년)군은 “러시아 전통 무술 ‘삼보’에 관심이 많다”며 “러시아어를 배우며 고려인들과 친구가 되고 삼보에 대해 더욱 많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고려인마을 대표인 우즈베키스탄 출신 신조야(60·여)씨는 “강좌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수준을 넘어 문화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도록 해보겠다”고 밝혔다. 이에 맞춰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의 전통의상·음식·춤 등에 대한 소개도 강좌에 포함할 계획이다. 또 이 관장과 수강생들은 다음달 추석 연휴 기간에 열리는 고려인들의 자체 추석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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