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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만사] 100년 전 '선배'들의 마음으로 외교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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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렴동에 위치한 외교부 청사에서 경복궁은 걸어서 5분 거리, 덕수궁은 10분 거리다. 경복궁을 가로막고 들어선 식민지배의 상징, 지금은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도 코앞에 있었다. 110년 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현장이자, 70년 전 광복으로 주권을 되찾은 현장이다. 외교부 직원들이 근처를 걷다 좁은 골목길을 보면 “이 길로 고종이 아관파천을 가셨을까”라는 실없는 농담을 하는 이유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외교가 힘이다’ 시리즈를 보도하면서 고종에 대한 재평가를 앞세웠다. 고종이 을사조약을 맺기 세 달 전, 아직 대한제국이 형식적으로나마 외교권을 갖고 있을 때 정부를 대표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보낸 친서가 핵심이었다. 기사를 본 독자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고종의 절실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고종의 재위 기간 44년 가운데 나라를 지키려는 필사적 노력은 마지막 10년 정도에 몰려 있다. 이 때는 이미 열강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한반도를 세력권에 넣기 위한 야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점이었다. 국제정세를 오판해도 단단히 잘못 본 것이다. 같은 기간 재위했던 일본의 왕 메이지(明治)가 근대화를 이룩한 것을 보면 더 그렇다. 공교롭게도 동갑내기였던 두 왕이 조국에 불러온 결과는 정 반대였다.

고종 역시 근대화와 개화를 추구하긴 했다. 하지만 갑신정변(1884년)을 일본의 사주를 받은 반역으로 간주하고 급진 개화파를 제거한 것이나, 러시아 영사관으로 도망간 아관파천(1896년) 이후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온건 개화파들을 처형한 것을 보면 말과 행동이 따로였다.

1892년 대한제국에 주재하던 영국 월터 힐러 총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고종을 얼마나 한심한 군주로 봤는지 알 수 있다. “고종은 돈에 관한 한 완전히 무모하며, 자신의 사치 방종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관직을 함부로 팔고 있다. 한국인 스스로 계획을 수립해 실행하도록 놔두는 것은 시간낭비다.” 그의 후임자 존 조던 역시 1896년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의 왕은 가장 어리석은 인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유일한 기술이란 적대적인 세력을 대립시켜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것 뿐”라고 했다.

그럼에도 고종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최근 학계에서 나오는 이유는, 타이밍은 늦었어도 그가 했던 외교적 노력들이 결국 이후의 독립운동에 긍정적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황제에 대한 애도이기도 했다. 사실 3·1운동은 국장예행연습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국제적으로 독립운동의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대한제국 때 열강과 국교를 수립한 것이 토양이 됐다. 특히 이때 수립한 프랑스와의 우호관계는 임정에 많은 도움을 줬다. 상하이 임정 청사도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고, 초기에 알게 모르게 지원을 많이 해줬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 고종에게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범진, 이한응과 같은 우국충신이 있었다는 것이 거의 유일한 행운이었던 것 같다. 초대 러시아 상주공사 이범진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러시아에 근무한 적이 있는 외교부 당국자에게서였다. 이범진은 주미 공사로도 일했었는데, 이 당국자가 당시 일화를 들려줬다. “이범진 공사가 길거리를 걷다가 지팡이로 양복점 유리를 건드려서 작은 흠이 생겼대요.

그런데 그 때만 해도 동양인이라고 얼마나 무시했겠어요. 양복점 주인이 나와서 소리를 지르며 유리창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돈을 물어내라고 했대요. 이때 이 공사가 ‘이 큰 유리를 다 갈겠다는 건가? 알았다’라고 한 뒤 갑자기 지팡이를 들어 전면 유리창을 산산조각냈다는 거에요. 그러고 나서 ‘어차피 내가 이 비용을 댈 거 아닌가’라고 태연히 말했단 거죠.” 이범진 공사의 ‘무용담’을 전하는 그 당국자의 얼굴은 금방 상기됐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았던 존경스러운 선배 외교관의 기개가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구한말 마지막 외교관들에 대해 알아봤다. 자결로서 일제에 항거한 외교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불과 서른하나의 나이에 영국을 상대로 끈질기게 독립 지원을 요청하다 고독하게 목숨을 끊은 영국 서리공사 이한응의 기록을 읽으면서는 안타까움에 눈물이 날 뻔 했다.
최근 한국이 처한 외교 상황은 구한말과 비교되곤 한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일본의 재부상 등 복잡한 국제정치 구도로 인해 끝없이 도전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은 ‘새우’에서 ‘돌고래’가 될 정도로 성장했고, 구한말과 같은 비극이 반복될 리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필요한 것은 한 세기 전 ‘선배 외교관’들의 마음가짐이다. 나라를 빼앗겨도 외교를 멈추지 않았던 절박함과 절실함이다. 기획 시리즈를 하며 내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다.

지난 7월 일제 강제징용 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보였던 한국의 외교력은 그런 의미에서 평가할 만 하다. 외교의 시작은 일본보다 늦었지만, 방법에서는 한국이 옳았다.

일본측에서는 가토 교코(加藤康子) 내각관방참여가 거의 아베 총리의 특사로서 등재 작업을 주관했다. 하지만 강제징용이란 아픈 역사만 쏙 빼겠다는 일본 입장에 세계문화유산위원회 위원국들이 흔쾌히 그러자고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가토는 상대국에서 무례하다고 할 정도로 공격적인 방식으로 일본의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외교가 소식통은 “가토의 행동에 대해 불쾌해하는 나라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강제징용 역사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일본을 지원하지 않겠단 쪽으로 입장을 돌린 나라도 있었다”고 귀띔했다.

한국은 도덕적 우위를 기반으로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전달하는 전략을 썼다. 국제적 영향력은 일본이 앞설 지 몰라도 강제징용 시설에서 행해진 야만적 행위들에 대해 알고서도 일본을 지지하겠다고 하는 나라는 없었다. 아베 총리가 결국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 일본 정부 대표가 강제징용을 사실상 인정하는 내용의 발표문을 읽도록 허용한 것도, 사실 막판에 가서 유럽과 제3세계 국가 두세곳이 표결에 들어갈 경우 반대하겠단 입장을 명확히 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옳았음은 등재 결정 직전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일본 외무성 외무심의관(차관보급)이 비공개 방한 했을 때도 드러났다. 당시 스기야마는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을 만나 난데없이 발표문에서 강제노동을 빼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에 조 차관은 문 밖에 들릴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일본의 억지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어 김홍균 차관보를 만난 자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외교부 안팎에서 신사답기로 소문난 김 차관보도 스기야마를 싸늘하게 대했다.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 외교부 당국자가 한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100년 전이었다면 일본을 상대로 이렇게 호통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우리 선배들은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이 장면을 봤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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