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떠나기 싫다, 가까운 곳에서 즐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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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고 도시에 머무르는 사람이 많다. 비싼 항공료와 숙박비, 긴 이동시간, 짐 싸기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익숙한 공간에서 시간이 날 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휴식를 보낸다. 전시와 공연을 관람하고 맛집 투어를 한다. 스파를 찾고 시내 호텔에서 묵는다. 이처럼 도심에서 휴가를 보내는 ‘스테이케이션’이 진화하고 있다. 스테이케이션은 '머물다(Stay)' 와 '휴가(Vacation)'가 합해진 신조어로, 집 또는 집 근처에서 머물며 휴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인천 송도 국
제도시는 서울에서 불과 1시간이면 닿을
수 있어 도심에서 휴가를 보내려는 이들
에게 각광받고 있다.

“항공권과 숙박료는 오를 대로 올랐고, 바닷가나 관광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굳이 남들 다 떠나는 이때, 여행을 가야 할까요?” 직장인 박영민(36·서울 삼성동)씨의 말이다. 박 씨는 올여름 특별한 휴가 계획이 없다. 휴가 일주일 중 하루나 이틀은 평소 보고 싶었던 전시와 영화를 관람하고 나머지는 집에서 쉴 생각이다.
 주부 김혜성(42·서울 잠실동)씨는 해외 휴양지 대신 집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인천 송도 특급호텔 패키지를 예약했다. 김씨는 “몇 달 전부터 계획해 항공권을 구입하고 숙소를 결정하는 등 여행 일정을 짜는 것도 스트레스”라며 “송도는 이국적인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데다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라 가깝고 공원과 쇼핑몰, 맛집이 모여 있어 종종 찾는 곳”이라고 말했다.
 최근 시장조사 전문기업 ‘마크로밀엠브레인’이 19~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름휴가 때 여행을 가야 하는가’를 조사한 결과 ‘여행을 가지 않아도 좋다’는 의견이 51.7%로 ‘꼭 여행을 가야 한다’(43.1%)는 의견보다 많았다. 바쁜 일상과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 사이에서 모 카드사 광고 문구처럼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휴식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보고 쇼핑 즐겨
스테이케이션은 크게 두 가지. 평소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일을 하면서 ‘문화·감성적으로 재충전’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대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활동적인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주로 공연이나 전시,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며 휴가를 즐긴다. 이제 막 문을 연 ’핫’한 공간들은 휴가를 보내기 가장 좋은 장소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디올의 전시인 ‘에스프리 디올-디올 정신’과 ‘앤디 워홀 라이브전’이 열리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패션이나 팝아트에 관심이 많은 이에게 더없이 좋은 재충전 공간이 될 것 같다.
 이달 초 문을 연 메가박스 코엑스의 ‘계단 아래 만화방’에서는 이미 영화화됐거나 될 가능성이 있는 작품 위주로 엄선된 약 3000여 권의 만화책을 만날 수 있다. 국내 최초의 영화 전문 도서관인 ‘CGV 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에서는 영화 원작, 영화 전문서, 국내외 시나리오를 비롯해 영화에 창의적인 영감을 안겼던 미술, 사진, 건축, 디자인, 세계문학 고전 등 인문·예술 분야 등을 총망라한 장서들을 읽을 수 있다.
 

1 특급호텔 수영장은 여유롭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
어 짧은 휴가를 보내기에 그만이다. 사진은 서울 남
산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의 수영장 ‘오아시
스’. 2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주는 스파. 3 다양한 전
시가 열리고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문화
감성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공간이다.

특급호텔 물놀이, 스파 인기
그냥 쉬기만 하는 걸로 치자면 특급호텔 패키지만 한 것이 없다. 개인 취향에 맞는 상품도 속속 나온다. 서울 신라호텔 마케팅 송용우 그룹장은 “고객층을 세분화해 맞춤 상품을 기획하고 있다. 저녁 수영만 선호하는 커플 고객을 위해 ‘문라이트 스위밍’을 포함한 상품을 만들고, 친구끼리 휴가를 보내고 싶은 고객을 위해 여성 3인을 위한 혜택과 뷰티 제품을 함께 구성한 상품을 내놓는다”고 설명했다.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은 호텔에서 30시간을 보낼 수 있는 ‘핫 서머 30℃’ 패키지를 운영 중이다. 오후 4시 체크인하고 다음날 오후 10시에 체크아웃하는 이 획기적인 상품은 호텔 매니어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서울 신라호텔이나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 그랜드 하얏트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 힐의 서머 패키지는 조용한 힐링을 선호하는 이들이 선호한다. 객실 1박과 야외수영장 이용, 바비큐 뷔페 등이 포함돼 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곤지암리조트 ‘스파라스파’의 스파&힐링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휴식과 건강관리를 동시에 할 수 있다. 스트레스 관리, 마사지와 요가, 아쿠아세러피, 사우나, 스파 푸드까지 포함된 6시간 코스는 하루 동안의 완벽한 힐링을 경험할 수 있어 휴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한국트렌드연구소 김경훈 소장은 “바쁜 일상 속에서 짧지만 의미 있는 휴식을 원하는 현대인의 욕구가 다양한 스테이케이션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도시에 자연친화적이고 문화적인 공간이 늘어나면서 도심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질 것” 이라고 말했다.

<하현정 기자 ha.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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