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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은퇴 후 살 곳을 정했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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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은퇴생활도 길어지고 있다. 60세 은퇴해 90세까지 산다해도 은퇴기간이 30년 가까이 된다. 잠자고 밥먹는 시간을 빼고 활동하는 시간으로 따지면 8만 시간이 훨씬 넘는다. 은퇴생활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세우지 않으면 이 길고 긴 시간을 허송하게 된다.

은퇴설계를 할 때 어디서 살 것인가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내 집에 계속 살지 여부부터 이사한다면 어디로 갈 것이며, 집 크기는 어느 정도 할 것인지 등 고민해야 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도시에서 복닥거리며 살아 왔는데, 은퇴후엔 귀농·귀촌으로 전원생활을 즐긴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대개 50대까지는 은퇴 생활비 등 재정적인 준비에 치중해 오다 그 이후부터는 거주지 문제로 관심사가 옮겨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 마다 사는 취향이 각기 다르고 경제적인 사정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사안이다. 다른 건 몰라도 노후 거주 문제는 부부가 일견 일치를 봐야 쉽게 풀린다. 남편이 시골로 내려가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싶어도 부인이 반대하면 성사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인지 노후에 살 곳을 놓고 고민만하다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은퇴를 맞이해 원치 않는 주거생활을 하는 부부가 많다. 귀농을 결행했더라도 오래 못살고 도시로 다시 나오거나 역귀농으로 한적한 야외의 실버타운들이 경영의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어쨌든 주거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부부가 동의하는 공간, 건강상태, 이웃과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하게 선택해야 후회 없는 삶을 보낼 수 있다.

내 집 살기, 귀농·귀촌 생활, 도·농 셔틀 거주…

노후 주거문제와 관련해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지금 사는 집에서 계속 살지 여부다. 노후에도 내 집에서 사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대개 은퇴 직전의 자기 집 주거 환경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 이런 곳은 자녀교육이나 직장 출퇴근이 편리한 도심인 경우가 많다. 자녀들과 가깝게 지내거나 커뮤니티를 통한 인간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데 무엇보다 유리하다. 삶의 계속성은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또 집 값이 잘 떨어지지 않아 자산관리 측면에서도 좋다. 물론 은퇴후 내 집 살기는 경제적 형편이 뒷받침돼야 한다. 소득흐름이 왕창 줄었는 데도 주거 비용이 비싼 내 집을 고집할 수 없다. 이럴 때 집 사이즈를 줄이는 게 대안이다. 자녀 교육· 결혼을 끝내 부부만 남았으니 집을 줄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하는 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직장도 잃고 돈도 잃었는데, 정든 주거환경마저 포기해야 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스트레스다. 이럴 때 주택연금이 해결사다. 주택연금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다달이 연금을 받기 때문에 살던 집에서 계속 살면서 생활도 가능하게 한다.

전원의 삶을 꿈꾸는 사람도 많다. 지난해 귀농ㆍ귀촌 가구는 3만 2424가구로 역대 최다 기록을 갱신했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대도시에 사는 580만 베이비부머 세대 가운데 13.9%가 10년 내에 농촌으로 이주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원생활을 통한 다양한 삶의 추구, 교통 발달로 인한 접근성 증대 등으로 시골로 향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해봐야 할 점이 있다. 과거에는 귀농· 귀촌이라 하면 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요즘은 귀농을 생계와 연결짓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시골로 이주한 도시민 대부분이 직접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등 경제적 동기가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농사가 말처럼 쉬운 일인가. 평생 풀 한번 베어 보지 않다가 갑자기 뙤약볕 아래 농사를 짓다는 건 중노동이나 다름없다. 귀농인구 중에 정착에 실패해 역귀성하는 비율이 정부 통계 상으로 8%에 그치지만 실제론 이보다 훨씬 많다고 귀농인들은 말하고 있다. 귀농생활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최근엔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셔틀 거주족'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일주일 중 전반부는 도시에서 살고 , 후반부는 시골에서 귀농생활을 하는 식이다. 도시에 자기 집을 두고 지방에 1년짜리 전세를 구해 살다가 전세기간이 끝나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며 전국을 돌아다니겠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귀농의 위험관리 차원으로 보여진다.

선진국에선 자기 집 선호 현상 뚜렷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들 나라에선 2000년대 들어 은퇴 주거지 선택과 관련해 자기 집 선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전원주택과 대규모 실버타운이 인기를 끌었지만 고령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도심이나 도시 근교로 돌아오고 자신이 살던 집에서 젊은이들과 왕래하면서 활발하게 살아가는 은퇴자가 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미국은퇴자협회(AARP)가 45세이상 미국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 86%가 자기 집에서 사는 것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웨덴에선 65세 이상 노인 중 94%가 자기 집에서 살고 있을 정도로 노후에도 내 집에서 사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특히 이미 은퇴도시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은 은퇴자들 상당수가 이주 계획을 접고 대신 자신이 거주하고 있거나 젊은 시절 거주했던 지역을 찾아다니고 있다.

보통 노후 준비하면 돈 문제만 생각하지, 어디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이냐는 후순위로 밀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을 정리하며 30년이란 장구한 시간을 보낼 생활 터전을 정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평소 맘에 드는 거주지를 ‘찜’해 두고 차근 차근 준비하거나 내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면 노후자금을 여유있게 만들어 놓는 게 바람직하다. 당신은 이 긴 시간을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지를 결정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가.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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