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나이 차별은 더 서럽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나이는 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마지막 차별대상인가.

연령차별이 재계나 금융계는 물론 공공부문에서도 당연한 인사관행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이 든 것도 서글픈데 원로 대접을 받기는커녕 부담스러운 식객으로 눈치를 봐야 하는 분위기가 어느덧 사회 전체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대한은퇴자협회 주명룡 회장은 "성(性), 장애인 차별은 물론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차별까지 법으로 금지돼 있는데도 연령차별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이 활발한 미국에서도 40세가 넘는 흑인여성은 함부로 내보내지 못하는 '철밥통'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엄격한 차별금지 항목인 성.인종.연령이라는 '철의 삼각지대'에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창창한 장년층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내몰리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대부분의 관리직은 40대 중반에 임원이 못 되면 알아서 그만두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LG그룹 관계자도 "정년은 통상 55세로 정해져 있으나 임원승진을 못할 경우 정년을 채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특히 50대에 접어들면 정년이 한참 남았는데도 직장에서 '퇴출 0순위'로 꼽히는 추세다. 또 30대 초반과 기혼여성은 취업연령 제한으로 직장에 원서조차 내지 못한다. 기업들은 '능력주의 인사'를 주장하지만 당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연령이 기준이었다고 말한다.

서울 영등포에서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학(李相學.50)씨는 지난해 1월 20년간 다니던 음료제조회사를 그만뒀다. 정년이 6년이나 남았었지만 회사 측은 "나이도 많고 승진대상도 한정돼 있다"며 비슷한 연령대의 동료 10여명과 함께 퇴직을 요구했다.

李씨는 한직으로 발령되는 수모를 참으며 버텼지만 결국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회사 측이 권고사직을 수용하면 위로금을 주지만 거부하면 보직도 박탈하겠다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7월 1천4백여개 사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 3년간 정리해고를 실시한 업체 중 해고기준으로 연령을 고려했다는 응답(복수응답)은 전체의 51.8%, 근속연수를 고려했다는 응답은 45.9%였다.

인사고과를 고려했다는 응답(63.6%)보다는 낮지만 근속연수도 연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 나이가 결정적인 기준이었던 셈이다.

이와 함께 취업연령을 제한하는 관행도 개선돼야 할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노동연구원이 10인 이상 사업체 1천5백여개를 대상으로 지난해 취업기준을 조사한 결과 전체의 51.8%가 취업연령 제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물론 현대자동차 등 2000년 상반기 입사전형부터 연령제한을 없앤 대기업도 상당수 있다. 그러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구직자들에겐 취업연령 제한이 큰 장애가 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도 취업연령 제한에 대한 진정이 지난 한 해 동안 5건에 불과했으나 올 들어서는 13건이나 접수됐다. 인권위 관계자는 "진정 사건 중 3분의 1 정도는 명백한 차별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인구 노령화와 저출산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장년층을 조기퇴직시키거나 청년실업자들을 양산할 경우 민간소비가 위축돼 경제활동이 둔해질 가능성이 있다.

노동연구원 장지연 연구위원은 "지난 수십년간 성차별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연령차별은 문제 제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