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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 스트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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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15일 직장인 백지연(27·여)씨는 점심을 먹는 대신 회사 근처 은행에서 신분증을 들고 한 시간을 기다렸다. 스마트폰에 깔린 카드 앱을 업데이트하는 과정에서 자동 로그인 기능이 해제돼 비밀번호를 입력했지만 5회 연속 ‘오류’가 나온 것이다. 백씨는 “평소 사용하던 비밀번호 조합에 이 숫자, 저 숫자를 바꿔 넣어봤는데 계속 틀려 계정이 잠겼다”며 “직접 방문해야 바꿀 수 있다고 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은행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가입한 사이트들마다 자주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해 더욱 헷갈리는 것 같다”고 했다.

 ‘비번(비밀번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현관문부터 노트북, 금융 거래용 공인인증서까지 외워야 하는 비밀번호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선 금융기관은 물론 각종 온라인 사이트에서도 ‘대문자, 숫자, 특수기호’가 포함된 비밀번호 조합을 요구하면서 스트레스를 더욱 키우고 있다. 본지가 성인남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1%가 ‘한 달간 비밀번호를 네 번 이상 바꾸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비밀번호를 변경하는 셈이다.

 비번 스트레스의 주범은 사이트마다 제각각 다르게 요구하는 비밀번호 조건이다. 포털 사이트 비밀번호의 경우 네이버가 ‘6자리 이상’인 데 비해 다음은 ‘8자리 이상’이다. 네이버에서 6자리로 비밀번호를 설정한 이용자가 다음을 이용하려면 숫자를 추가하거나 새로운 비밀번호 세트를 만들어야 한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중 78%가 ‘비밀번호 세트를 3개 이상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대문자나 특수문자 등 조건이 추가되면 이용자들의 혼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영문 알파벳과 숫자를 섞어 쓸 것을 요구하는 인터파크·지마켓 등 온라인 쇼핑몰, 금융기관 공인인증서, 카드·은행 앱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장희문(52·주부)씨는 “어떤 사이트는 대문자가 필요하다고 하고 어떤 사이트는 특수문자를 넣으라고 하니 여러 가지 조합이 필요하다”며 “하도 헷갈려 스마트폰 메모장에 사이트와 비밀번호를 일일이 적어놨다”고 말했다. 설문조사 응답자 중 76.5%가 대문자가 필요한 경우 비밀번호 첫글자를 대문자로 바꿨다. 또 특수문자를 넣어야 할 땐 46.5%가 ‘!’를 넣는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기억하기 위해서지만 그만큼 보안은 취약해진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겪는 스트레스를 일컫는 ‘패스워드 증후군’, 비밀번호를 자주 잊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디지털 치매’ 같은 신조어까지 나왔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중 80.4%가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월평균 1~3회 재설정한다’고 답했다. 비밀번호를 연속으로 틀린 뒤 재설정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스트레스로 꼽힌다. 이형훈(30·자영업자)씨는 “비밀번호가 틀려 보안문자까지 입력하는 경우 보안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하는데 새로 깔려면 10분은 족히 걸린다”며 “몇몇 프로그램은 스마트폰엔 깔리지도 않아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비번 스트레스가 지난해부터 부쩍 심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013년 ‘3·20 사태’로 불리는 농협 전산망 해킹 등이 발생하면서다. 고려대 손영동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해킹과 집단소송으로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기업들의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높아진 상황”이라며 “비밀번호에 특수문자까지 요구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사이트의 안전도를 높이기보다 이용자 개개인에게 너무 많은 보안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안솔루션 업체인 엠큐릭스 박현주 대표는 “당분간은 불편하더라도 이용자가 자체적으로 여러 세트의 비밀번호를 관리하는 게 안전한 방법”이라고 했다.

조혜경 기자 wisel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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