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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단임제론 책임정치 못해 … ‘87년 체제’ 극복 시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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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07면

개헌론의 핵심은 권력구조 개편에 맞춰져 왔다. 87년 민주화의 산물인 ‘대통령 5년 단임제’는 한계에 직면했다는 게 많은 헌법학자의 견해다.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87년 민주화 당시 국민의 요구는 ‘대통령은 내 손으로 뽑아야겠다’와 ‘장기집권은 싫다’ 이 두 가지였다”며 “이를 관철하다 보니 다른 건 소홀하게 생각한 점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박상철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은 “국민이 대통령 선출권만 갖고 심판권은 없는 현행 헌법의 5년 단임 대통령제는 한번 당선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 추궁과 심판의 대상을 실종시켜 버린다”며 “5년짜리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악순환의 고리를 해소하려면 개헌을 통해 정상적인 권력구조를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헌절 67주년 기획 다시 개헌을 말한다 <상>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원회는 지난해 ‘분권형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제시했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외교·안보·통일 등 외치(外治)에 전념하고 국회가 선출한 국무총리가 내치(內治)를 맡는 ‘이원정부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또 현행 5년 단임제인 대통령은 임기를 6년 단임으로 늘리되 대통령이 권한 행사를 초당적·중립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당적 이탈을 헌법에서 규정하도록 했다. 헌법개정자문위원장을 맡았던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헌법학)는 “우리나라의 정당정치 구조에서는 이상적인 의원내각제를 운영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분권형 개헌으로 의원내각제적인 요소를 도입해 정당 간 협치(協治)를 하도록 하되 중립적인 국가원수인 대통령에게도 의례적 권한이 아닌 국무총리를 견제할 수 있는 실질적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4년 중임제로 개헌하자는 주장도 있다. 내각제를 바탕으로 설계된 이원정부제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정만희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국 정치에서는 정부와 정당에서 2명의 최고지도자가 권력을 공유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협력한 경험이 거의 없다”며 “이원정부제를 도입할 경우 대통령과 총리 간에 권한 분배를 둘러싸고 새로운 갈등과 비효율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같은 4년 중임제가 우리나라 정치 구조상 훨씬 좋은 제도라고 본다”고 말했다.

국회의사당 중앙홀에 있는 청동부조의 제헌헌법 전문 첫 부분. 김상선 기자

통일 대비한 양원제 도입도 거론
여야가 강대강(强對强) 구도로 대립하고 있는 국회도 대표적인 개헌 대상이다. 국회선진화법 시행으로 국회 내 폭력은 사라졌지만 다수결의 의미가 무력해진 게 현실이다. 국회의장도 직권상정 권한이 제한되면서 조정 능력을 잃었다. 이런 국회의 무능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게 ‘양원제’ 도입이다. 현재 300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단원제 구조를 민의원(하원)과 참의원(상원·지역대표)으로 분리해 서로를 견제·보완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국제의원연맹(IPU)에 따르면 194개국 중에서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78개국(2012년 기준)으로 40.2%를 차지한다.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 내에 하나의 원밖에 없다 보니 여야 간에 심각한 대립이 발생했을 때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며 “미국의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이 대통령과 여당·야당이 충돌할 때 조정자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장기적으로 통일을 생각했을 때도 북한의 인구가 우리나라보다 적기 때문에 북한의 지역대표들이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문화 등 시대 반영한 개헌 주장도
현행 헌법은 87년 이후 28년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통치구조를 바꾸기 위한 ‘원포인트 개헌’이 아닌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한 ‘생활형 개헌’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대표적인 게 기본권 조항이다. 현행 헌법에서 기본권을 갖는 주체인 ‘국민’을 보편적 의미의 ‘사람’으로 확대하고, 다문화시대에 맞게 폐쇄적으로 오인될 수 있는 ‘민족문화’ 등의 표현은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안전하게 살 권리,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정보기본권), 성 평등과 같은 기본권을 도입하는 등 기본권을 보다 체계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헌법 제117~118조에서 규정한 지방자치도 개헌론의 화두 중 하나다. 일각에선 지방자치 확대라는 시대 흐름에 맞게 지방 분권을 선언적으로 명시하고 지방정부의 자주적 과세권·재정권 등을 보장하는 등 ‘지방분권형 개헌’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김선택 교수는 “87년 개헌 당시의 국민보다 지금의 국민이 훨씬 더 다양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개헌을 한다면 논의 과정에서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쳐야 한다”며 “국민이 직접 헌법 개정에 참여한 아이슬란드의 사례처럼 국민과 함께하는 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소조항 없애고 맞춤법도 손질해야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또 있다. 헌법 제29조 제2항의 이른바 군인·군무원이 국가에 대해 배상 신청을 할 수 없도록 한 ‘군인·군무원에 대한 이중배상금지’ 조항은 삭제해야 할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이 조항은 애초 하위법인 법률 조항에 있었으나 당시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졌던 대법원이 71년에 “군경과 민간인 혹은 군경과 다른 공무원을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조항”이라며 위헌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72년 유신헌법에서 헌법 규정으로 만든 이후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다. 당시에는 군인·군무원 등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배상을 할 수 없었던 현실이 작용했지만 지금처럼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가능해진 여건에서는 손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현행 헌법에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도 문제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국민투표에 붙인다’는 표현은 ‘어떤 문제를 다른 장소나 기회로 넘겨 맡기다’라는 뜻의 ‘부치다’로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다.



헌법 제1조, 국가와 국민 중 무엇이 우선일까

헌법 제1조는 최고의 규범으로 불리는 헌법 중에서도 첫머리를 장식할 만큼 국가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규정돼 있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된 뒤 67년간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62년 5차 개헌 때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가 2항에 추가됐다. 이 조항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1919~33) 헌법 제1조 ‘독일은 공화국이며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에서 영향을 받았다.

 외국에선 국가 체제의 정체성보다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 ‘종교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독일도 나치 정권 이후 헌법 제1조1항이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책무다’로 바뀌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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