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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240원이면 한 달 5000원 아끼잖아요…이게 진짜 서민 버스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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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밤기운이 가시지 않은 까만 어둠의 시간.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는 18-137번 버스정류장에 하나둘 사람이 모여들었다. 정확히 오전 4시가 되자 언덕 아래에서 두 줄기 헤드라이트가 비췄다. 빛줄기와 함께 도착한 건 8541번 버스. 김인소(61)씨는 이 버스의 단골 승객이다. 강남역에 있는 빌딩 기계실에서 일하는 그는 매일 이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 6시까지 도착해 철야 근무한 동료와 교대하는 그에게는 유일한 통근 수단이다.

김씨와 함께 버스에 오른 임모(68)씨도 단골이다. 이 버스로 출근한 지 6년이 넘었다. 고속터미널역에서 4212번으로 갈아타고 논현동까지 간다. 빌딩 청소를 하는 그의 출근시간은 오전 6시30분이지만 늘 6시까지 간다. “(직장인들이) 출근하기 전에 청소해야 하니까 일찍 서둘러요. 안 마주쳐야 서로 편하거든요.” 그의 집은 첫 정류장과 도보로 30분이나 떨어져 있다. 정류장 5개 거리다. “운동도 하고 앉아서 가려고 거꾸로 걸어와요.” 버스는 10분을 머물러 10명 가까운 승객을 태운 뒤 출발했다.

평일·토요일 20분 간격으로 운행

지난달 27일 서울시는 지하철과 버스 요금을 150~450원 인상했다. 성인 요금 기준으로 지하철 1250원 간·지선버스 1200원 마을버스 900원 심야버스 2150원 광역버스 2300원이 됐다. 요금 인상과 함께 새로운 제도도 도입됐다. 조조할인이다. 첫차부터 오전 6시30분까지 교통카드를 사용해 탑승하는 승객에게 요금 20%를 깎아준다. 금액으로는 180~460원 할인이다.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 대해 여론은 불만 일색이다. 곱지 않은 시선은 조조할인에도 쏟아진다. “요금 올려놓고 약 올리느냐” “극장도 아니고, 버스에 웬 조조할인이냐” “그 시간에 다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혜택을 받는 이는 생각보다 많다. 서울시에 따르면 조조할인 시행 전 오전 6시30분 이전에 지하철·버스를 탄 승객은 하루 평균 34만6937명이었다. 제도 시행 후엔 하루 평균 1만1487명이 늘었다. 굳이 서울시의 발표를 댈 것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모두 잠든 시간에 일터로 나간다. 그리고 이들을 위해 새벽에만 운행하는 ‘맞춤버스’도 운행 중이다. 앞선 8541번 버스가 그것이다.

버스는 시흥동을 출발해 강남역을 돌아 관악구 행운동 주민센터에서 운행을 마친다. 평일·토요일 오전 4시10분 첫차부터 20분 간격으로 단 3대만 운행한다. 특별한 운행 시간표 때문에 서울시는 ‘맞춤버스’라 이름 붙였는데, 또 다른 이유로 8541번은 ‘생계형 맞춤버스’로 불린다. 승객 대부분이 금천·관악 일대에서 강남으로 출근하는 생계형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날 버스를 채운 승객의 80%는 파마머리의 중·노년 여성이었다. 운전기사인 권오성(65)씨는 “거의 강남 빌딩 청소하는 아줌마들이에요. 콩나물시루가 따로 없어요. 그나마 토요일엔 좀 낫지. 격주로들 쉬는지 3분의 2쯤 차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승객들을 거의 다 알아봤다. “첫차 타는 사람은 첫차만 타거든. 매일 같은 얼굴이야.”

정류장마다 승객이 몰리더니 세 번째 정류장에서 좌석이 다 채워졌다. 아홉 번째 정류장에선 만원이 됐다. 김영자(74)씨는 운 좋게도 마지막 남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강남역에 있는 빌딩에서 청소를 한다.
“아침부터 서서 가면 힘 빠지고 종일 힘들어. 여기 다 먹고살려고 다니는 사람들인데…. 200원이라도 깎아주니까 좋지. 누가 우리
같은 사람 생각해 줬나 몰라.”

그는 20년도 넘게 이 길을 따라 출근한다고 했다. 이 버스 아니면 새벽 길을 나설 수가 없다며 “예전에 5214번 없어진다고 했을 땐 내가 구청 가서 데모도 하고 그랬잖아”라고 말했다.

“버스가 생계수단” 폐선 위기 넘기고 부활

5412번은 8541번의 전신이다. 역시 시흥동에서 출발하는 강남행 버스였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는 5412번은 관악구에서 가장 자주 다녔고 이용자도 많았다. 그런데도 버스는 2008년 사라졌다.

2000년대 들어 서울시는 대기 환경 개선을 위해 경유 버스를 CNG(압축천연가스) 버스로 교체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악구엔 CNG 충전소가 없다. 5412번을 운영하는 관악교통은 먼 곳까지 가서 충전하며 노선을 유지했다. 그 와중에 또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차고지의 땅 주인이 건물을 짓겠다며 연장 계약을 거부한 것이다. 새로운 차고지를 찾아 시흥동 일대의 부지를 물색했지만 허사였다.

2005~2006년의 일이다. 그때 마침 양천구 신정동에 양천공영차고지가 완공됐고, 관악교통의 버스는 신정동으로 옮겨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차고지가 영업 지역과 지나치게 멀어진 것이다. 첫 정류장인 시흥동까지 12㎞ 거리였다. 빈 버스로 한참 달려 운행을 시작하고 운행이 끝나면 또 빈 버스로 회송해야 한다는 얘기다. 회사는 왕복 25㎞에 달하는 공차 운행을 감당했지만 회차 지점에서 버스가 노상에 정차하고 운전기사들이 쉬는 것에 대한 민원이 쏟아졌다. 노선을 살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자 새벽 출근을 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하철도 다니지 않는 시간, 유일하게 강남을 향하는 버스는 승객들의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5412번 노선은 셋으로 찢어졌고 8541번이 ‘맞춤버스’로 신설돼 새벽에만 기존 노선을 달리게 됐다.

그래서 8541번 버스들은 하루 한 번 운행을 마치면 종일 차고지에 머문다. 기사들의 근무 시간표도 특별하다. 이날 첫차를 운전한 권오성씨는 지난 5월부터 8541번을 몰았다. 운전 경력 40년이 넘는 그는 정년퇴직 후 1년씩 계약을 이어오던 터였다. 힘에 부치자 수월한 일을 찾아 8541번 운전대를 잡았다. “하루 9~10시간씩 운전하면 힘들어요. 그런데 이건 차가 안 막히니까 편해. 강남 갔다가 차고지로 돌아오는데 2시간도 안 걸리거든. 월급은 반쯤 되는데, 나이 먹었다고 놀면 뭐해요.” 이렇게 8541번을 하루 한 바퀴만 운전하는 기사는 2명이 더 있다. 모두 정년이 지난 기사들이다.

봉천사거리 역에 이르자 버스는 터져버릴 듯 미어졌다. 앞문으로 타지 못한 승객들이 뒷문으로 밀려들었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오늘 사람이 왜 이렇게 많대….” “거기 가방 놓을 데 있어요?” 고단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뒷문 바로 뒷좌석에선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서 가면 힘들다고, 2인용에 한 명 더 앉혀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난 괜찮다니까.” “아냐, 쬐꼬만 사람은 앉고도 남아.” 이기지 못하는 척 한 아주머니가 좁은 틈에 엉덩이를 반쯤 걸쳤다. 사당역이 다가오자 김모씨(62)는 연신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그가 청소하는 빌딩은 잠원동에 있다. 사당역에서 갈아탄다고 했다. 제때 환승하지 못하면 출근이 늦어진다며 “에구, 못 타겠네. 늦었네!”를 연발했다. 그때 앞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앞에 버스 있다. 내려!“ 김씨는 가방을 챙겨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렸다.

운전기사 권씨에 따르면 승객의 상당수는 사당·고속터미널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양재·논현·잠원 등 강남 곳곳으로 간다. 배차 간격이 긴 이른 새벽엔 버스 한 대를 놓치면 무조건 지각이다. “사람이 많이 타서 출발이 늦어지거나 신호에 자꾸 걸리면 아줌마들이 환승을 못해요. 그러니까 버스 놓칠까 봐 내려서 뛰고, 횡단보도 막 건너고 그래. 나한테 재촉도 하고. 첫차 시간을 5~10분만 당겨주면 좋겠어. 맘 편하게들 출근하게.”
이날도 버스는 봉천사거리에서 2~3분 지체된 터였다. 승객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운전기사를 괜히 타박했다.

경기도 버스와 연계, 할인혜택 주장도

회송 지점인 강남역에 다가갈수록 버스의 인구 밀도는 낮아졌다. 버스에 남은 이들을 향해 “수고해” “또 봐” 라는 인사를 남기고 내리는 이들도 생겼다.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5시3분. 3분이 늦었다.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출근 승객이 내린 버스로 대여섯 명이 올라탔다. 이제부터는 퇴근 버스다. 작은 크로스백을 맨 중년 남성은 밤새 운전한 대리운전 기사처럼 보였다. 그는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정재임(58)씨는 주점에서 주방 일을 한다고 했다.

매일 오후 5시에 출근해 오전 5시 퇴근하는데 8541번의 존재를 최근에 알았다. “집이 사당이니까 이거 타고 가면 좋지. 그 전엔 지하철 다닐 때까지 기다리거나 가게에 오는 대리기사 실어 나르는 봉고차를 같이 타고 그랬어요.” 스무 명도 안 태운 버스는 왔던 길의 반만 간다. 첫 정류장은 금천구 시흥동이었지만 마지막 정류장은 관악구 봉천동이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또 누군가는 운행을 시작한 지하철을 탄다.

8541번 세 대가 모두 양천 공영차고지로 돌아가도 시간은 오전 6시30분이 안 된다고 했다. 버스에 혼자 남겨진 운전기사 권씨가 말했다.
"이게 진짜 서민 버스예요. 하루 200원씩만 아껴도 한 달이면 5000원이 넘잖아요. 다들 좋아라 한다니까요."

8541번이 특별 편성된 건 버스 운행 정보 분석과 버스를 오래 운전한 기사들의 건의 덕분이었다. 조조할인 역시 새벽시간 대중교통 이용 실태를 분석해 생계형 서민에게 혜택을 주고자 도입됐다. 서울시 버스정책과 구재성 팀장은 “교통카드로 동선을 파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어떤 승객들이 타는지 짐작은 가능하다. 승객 특성을 잘 아는 운전기사들의 의견도 듣는다”고 말했다.

대중교통 요금 인상이 부담되는 건 새벽 출근하는 이들만은 아니다. 치솟는 전셋값 탓에 수많은 이가 직장과 멀리 떨어진 외곽으로 밀리면서 “서울의 교통이 서울 시민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는 말도 나온다. 이 때문에 유럽 국가들처럼 대학생을 포함한 학생 할인, 정기권 등 다양한 혜택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른 아침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이들의 볼멘소리도 나온다. 현행 조조할인은 광역버스와 서울 면허를 받은 버스에만 해당하는 데다 환승 땐 거리 비례 요금을 적용한다. 경기도 버스를 타고 오전 6시30분 전 서울에 진입해 서울 버스로 환승해도 할인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수도권의 철도·지하철·경전철·버스를 아우르는 통합환승제 아래에서도 요금 등 정책 결정은 각 시·도가 한다. 버스 준공영제를 운영하는 서울시와 민영제인 경기도의 상황이 다르고 제도의 일괄 도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기도 관계자도 “서울시와 달리 개별 회사가 자체적으로 할인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간섭할 수도, 강제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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